2022-24. 우리 이웃은 누구인가?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10:25-29
설교일시 2022-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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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웃은 누구인가?
눅 10:25-29
(2022/06/12, 성령강림절 제2주, 환경선교주일)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말하였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 신음하는 창조 세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인 동시에 감리교회가 지키는 환경선교주일입니다. 강단보 색이 흰색인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계절은 망종과 하지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농가월령가는 보리 수확철의 흥겨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드는 낫 베어다가 단단이(한 단 한 단씩) 헤쳐 놓고, 도리깨 마주서서 짓내어(흥에 겨워 마음껏 기분을 냄) 두드리니, 불고 쓴 듯하던 집안 졸연(卒然, 갑자기)히 흥성(興盛)하다.” 요즘은 이런 풍경을 볼 수 없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정겹습니다. 노래는 수확한 보리 덕분에 여름 농사 지을 힘을 얻었다면서 “천심을 생각하니 은혜도 망극하다”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겨우 겨우 끼니를 잇게 된 것을 은혜로 여기는 소박함이 아름답습니다. 이 마음을 잃어버려 우리 인생이 고달픕니다.

저는 코로나19를 일종의 경고의 나팔소리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든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산업 혁명과 더불어 화석연료 사용이 급증하게 되었고, 불과 몇 백 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지구는 깊은 병에 걸려 신음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얼마나 파멸적 결과를 초래할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빈발하는 산불, 대홍수, 가뭄, 혹한과 혹서, 사라지고 있는 빙하와 만년설은 지구의 건강이 스스로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징표들입니다. 기후는 예측하기 어렵게 변덕스럽고, 기후 재앙의 규모는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이동성이 증가하면서 감염병들도 세계화되고 있습니다. 지하수는 고갈되거나 오염되고 있고, 지표면은 불모화되고 있습니다. 바다 생태계도 천지개벽과 같은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아름답던 해안지역은 오염되어 사막처럼 변하고 있고, 물고기 개체수들도 급감하고 있습니다.

플라스틱 문제도 심각합니다. 플라스틱은 유기화합물을 가공하여 만든 고분자 화합물을 이르는 말입니다. 열이나 압력을 가하면 다양한 형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산업의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합성수지라고도 부르는 플라스틱은 1909년에 미국에서 처음 개발되었는데 석유, 석탄, 천연 가스를 원료로 하여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손쉽게 사용하는 플라스틱도 화석연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신용카드로 지불하겠다고 할 때 ‘크레딧 카드’라는 말보다 ‘플라스틱’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I prefer to pay with plastic). 아름다움을 만들어준다는 성형수술은 ‘plastic surgery’라 합니다. 플라스틱은 사람들에게 편리한 삶, 멋진 삶을 보장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분자화합물은 자연 속에서 잘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땅과 강, 그리고 바다에 사는 생명들의 몸속에 쌓이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편리함을 위해 만든 플라스틱이 지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도처에서 피조물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흐뭇하게 바라보셨던 창조 세계가 인간의 과도한 소비와 욕망으로 인해 병들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창 1:25)는 구절은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지만,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된 삶을 살라는 일종의 도전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그것을 아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때 찬양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지금 피조물들은 신음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때 사람들은 창조 세계를 돌보는 것이 신앙과 무관한 일인 양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에 집중하느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 세계의 청지기로 삼으셨습니다. 돌보고, 가꾸고, 저마다의 자리를 잘 지키도록 다스리는 것이 인간의 책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를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철저한 참회가 필요한 때입니다.

• 욕망 위에 세워진 문명
박승옥 선생이 쓴 <잔치가 끝나면 무엇을 먹고 살까?>라는 책을 접하는 순간 어떤 불길한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우리 문명에 대한 경고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잔치는 자연 약탈을 극대화한 석유산업 문명을 일컫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 가운데 90% 이상은 석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흥청망청 모든 것을 다 거덜낸 잔치가 바야흐로 끝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생존이 문제가 되는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지 않고는 지구의 미래가 밝지 않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욕망의 쳇바퀴를 돌림으로 유지됩니다. 그 쳇바퀴에 오르는 순간 기쁨과 감사와 평안 같은 삶의 아름다운 가치들은 유보됩니다. 벌건 욕망만이 우리를 몰아대기 때문입니다.

• 지금 우리 이웃은 누구?
이 시대에 우리가 꼭 회복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우리 삶이 신비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감성과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인 오논다가 부족의 학교에서는 감사 연설Thankgiving Address로 한 주간을 시작하고 마친다고 합니다. ‘감사 연설’로 번역한 오난다가어의 본뜻은 ‘모든 것에 앞서는 말’입니다. 감사야말로 모든 것에 앞서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자기 주위를 둘러보며 생명의 순환이 계속됨을 살핍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또 뭇 생명과 더불어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사람의 의무임을 고백합니다. 그런 후 감사해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그 까닭을 밝힙니다. 아이들은 대지, 물, 물고기, 나무, 밭작물, 약초, 새들, 바람, 달과 별, 동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넵니다. 이 아름다운 전통을 소개해준 로빈 월 키머러는 감사 연설의 급진적 의미를 이렇게 밝힙니다.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혁명적 개념이기도 하다. 소비 사회에서 만족은 급진적 태도다. 희소성이 아니라 풍요를 인정하는 것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창조함으로써 번성하는 경제에 타격을 가한다. 감사는 충만의 윤리를 계발하지만, 경제는 공허를 필요로 한다. 감사 연설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있음을 일깨운다.”(로빈 월 키머러, <향모를 땋으며>, 노승영 옮김, 에디도스, p.169)

진정한 교육이란 이런 것입니다. 산업체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교육의 최종 목표여서는 안 됩니다. 써먹기 위한 공부를 넘어 공경을 가르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합니다. 놀라움과 신비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삶의 곤경 속에서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한히 값진 존재인 동시에 누군가의 도움과 사랑 가운데서 살고 있음을 자각하는 사람은 경거망동할 수 없습니다. 세속적인 성공에만 마음을 둘 때 우리 영혼은 납작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타락입니다. 가끔 우리의 일상과 거리 두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과 자주 접하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월든>으로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이 떠오릅니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자연의 시스템은 언제나 같은 속도로 순환한다. 싹은 마치 짧은 봄날이 영원하기라도 한 듯 서두르거나 갈팡질팡하지 않고 서서히 자라난다. 자연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각각에 필요한 시간만큼 지극한 공을 들인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소로의 문장들>, 박명숙 엮고 옮김, 마음산책, p.65-66)

한가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영혼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꼭 실천해야 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가득 찬 경이로움에 눈길을 줄 때 우리는 세속적인 가치관의 종살이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습니다.

• 타자의 얼굴
어느 날 한 율법교사가 주님께 다가와 아주 심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누가는 ‘예수를 시험하여 말하였다’는 구절로 그 질문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음을 암시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불순한 동기를 알아차렸으면서도 주님은 그와 대화를 지속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율법 전문가답게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의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말을 긍정하시면서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하고 응대하셨습니다. 참 간명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잘 알지만 짐짓 모른 체 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삶의 평온을 깨뜨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수고로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 지갑을 열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문제를 신학의 문제로 만들곤 합니다. 성경공부는 열심히 하지만 삶이 달라지지 않는 이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대로 행하여라’는 말씀은 소박하고 단순하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율법학자는 곤경에 빠졌습니다. 자기가 던진 함정 질문에 자기 자신이 빠진 셈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대로 행하여라’라는 말씀을 짐짓 괄호 속에 묶어두고 새로운 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질문 끝에 주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과 그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모른 체 하며 그냥 지나갔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에게 다가가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주님은 ‘누가 그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고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질문이 달라지면 대답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이웃은 지금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서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인간의 도덕적 의무는 ‘타자의 얼굴’과 만나는 순간 발생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얼굴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관계를 맺자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의 초대에 응할 때 우리는 의젓한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어쩌면 신음하는 피조물들이라 말씀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끙끙 앓고 있는 피조물들이야말로 우리가 다가가 돌보아주어야 할 이웃입니다.

•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우리가 창조 세계를 돌보아야 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온 세상이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세상의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식물과 동물 그리고 미생물이 없다면 인간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종들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우선 동료 인간들에게 행해야 하지만 이제는 이웃의 범위를 넓혀야 할 때입니다.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이웃으로 여길 때 우리 문명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한 출판사로부터 추천사를 부탁받았습니다. 아직 한글 책 제목은 정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 책은 Gayle Boss의 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사라지는 것들이 사순절에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사순절 6주간을 보내면서 매 주 네 종류의 멸종 위기종에 주목해 보자고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그 동물들이 얼마나 경이로운 존재들인지, 그리고 그 동물들이 처한 위험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는 것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는 계절에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수마트라 오랑우탄, 붉은가슴도요새, 아무르표범 파나마금개구리, 보노보, 아프리카 코끼리 등의 생태 이야기는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동시에 이 놀라운 기적들이 머지않아 지구상에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아팠습니다.

우리가 정녕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한다면 땅과 그 속에 거하는 것들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피조물이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덜 쓰고, 조금 불편한 삶을 즐겁게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한 실천이 이 무너져가고 있는 생태계를 재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땅한 일을 시작하는 용기입니다. 바울 사도는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갈 6:9)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우리의 이웃인 창조 세계가 끙끙 앓고 있습니다. 탄소배출을 최소화하는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인 동시에 기도입니다. 만리장성도 돌 위에 돌 하나를 올리는 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미켈란젤로의 그림도 선 하나를 긋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것처럼,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그런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소비하는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6월 12일 10시 32분 5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