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9.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눅 6:37-38
설교일시 2022-07-17
오디오파일 s20220717.mp3 [54955 KBytes]
목록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눅 6:37-38
(2022/07/17, 성령강림 후 제6주)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이다."]

• 이 장엄한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무더위와 오랜 고통에 지친 이들도 폭염을 피하는 그늘과 같으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잠시라도 쉴 수 있기를 빕니다. 혹시 보셨는지요? 미국 항공 우주국(NASA)이 제임스 웹 망원경(James Webb Space Telescope)을 통해 관측한 우주 사진 말입니다. 지구로부터 7600광년 떨어진 용골자리 대성운, 2억 8천 만 광년 떨어진 스테판 5중주 은하는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광년이란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이니, 우주는 정말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크고 장엄한 세계입니다. 그 거대한 은하들이 중력 작용으로 서로 줄다리기를 하듯 멀어지기도 하고 가까워지기도 한답니다. ‘저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고 말했던 파스칼의 마음을 알 것도 같습니다.

유럽과 중동은 불볕더위로 끓고 있고 섭씨 47도까지 올라간 곳도 많다고 합니다. 거대한 산불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또 지구촌의 다른 곳에서는 홍수 피해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알프스의 빙하가 녹아내리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흰 천으로 감싸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그게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는 없지만 흰 천에 싸인 빙하는 지구가 처한 심각한 상황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한 마음으로 생명의 터전인 지구를 돌보아야 하건만 인간은 여전히 자기중심주의의 오류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납니다.

저 가없는 우주에서 바라보면 거의 무에 가까운 존재인 우리가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아옹다옹 다투며 삽니다. 코헬렛은 그런 삶의 무상함을 알았기에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전 1:8)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놀랍고 장엄한 세상을 시장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아브라함 헤셸은 사람됨의 참 모습은 허세부리지 않음, 자신의 불투명함과 무력함 그리고 무지함을 깨달아 아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한 사람됨의 참 모습은 일어서서 분발할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사람됨의 목적은 우리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들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됨의 참 모습은 감사요, 그 비결은 찬양이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선집 3, <누가 사람이냐>, 이현주 옮김, 종로서적, p.106)

늘 말씀드리듯 사람됨의 소명은 자기를 넘어서는 데 있습니다. 나 좋을 대로만 살면 참 사람이 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해야 합니다. 그 마음에 접속될 때 우리는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지 말아야 할 것
인간은 관계를 맺는 존재입니다. 관계는 ‘빗장’ 관關과 ‘걸리다’ 또는 ‘잇다’는 뜻의 계係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닫아 단절하기도 하고 열어 연결되기도 하는 것이 관계입니다. 마틴 부버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방향과 내용과 질이 달라집니다.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타인을 심판하는 일과 정죄하는 일입니다. 심판하다는 뜻의 헬라어 krinō는 ‘분리하다’, ‘개별화하다’, ‘옳고 그름을 따지다’라는 뜻입니다. 심판하지 말라는 말은 아무런 도덕적 판단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별력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리지 못해 우리 인생이 복잡합니다. 전도서의 기자의 진단이 적확합니다.

“그렇다. 다만 내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사람을 평범하고 단순하게 만드셨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전 7:29)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의 능력과 도덕성을 가지고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뜻일까요? 그것은 스스로 절대 선인 것처럼 처신하지 말라는 말일 겁니다. 인류의 첫 사람들이 따먹은 선악과는 결국 자기를 모든 행위의 척도로 내세우려는 인간의 태도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너나할 것 없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내하심 덕분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전에 자기를 먼저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롬 2:1)

바울 사도는 자기를 돌아볼 줄은 모르면서 남을 심판하는 이들은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올리고 있는 것’(롬 2:5)이라고 말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정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katadikazō는 ‘누구를 거슬러 말하다’, ‘죄가 있는 것으로 단정하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일부분만 보고 그의 전체를 매도하기도 합니다. 오만함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인간 존재는 인간 되어감’(Mensch-sein ist Mensch-werden)이라 했습니다. 고대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이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과 함께 우리도 변하기 때문입니다. 정죄하는 것은 어떤 사람을 특정한 시간 속에 못 박는 행위입니다. 과도할 정도로 남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깨끗하고 의로운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자기 속에 상처가 많아서입니다. 차마 남에게 드러낼 수 없는 상처의 기억이나 열등감이 많은 이들일수록 관대하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 친절하고 성실한 사람
인간의 성숙함이란 자기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그것을 시정할 수 있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뉴욕주의 대법관이었던 프랭크 바바로Frank J. Barbaro는 1999년에 백인이 흑인을 살해한 사건의 재판을 맡았습니다. 피고인은 정당방위를 주장했으나 그는 그 주장을 배척하고 살인죄로 징역 15년을 선고하였습니다. 바바로는 자신이 한 판결을 복기하며 검토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유독 이 사건에 대하여 몸이 아플 정도로 마음이 불편하였다고 합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는 사건의 기록을 다시 검토하면서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피해자가 술에 취해서 피고인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고, 계속 달려들면서 피고인의 목걸이를 빼앗으려고 하자 피고인이 총을 쏘았던 것입니다. 정당방위를 인정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는 재판에서 그 사실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행위를 찬찬히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의 배경에는 인권주의자인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에 대해 품은 혐오감이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백인우월주의자인 피고가 흑인의 행패를 참았을 리 없다는 판단 때문에 그런 판결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는 14년이 지난 후에 자기 판결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재심을 열게 하여 그 판결이 편견에 의한 오판이라고 법정에서 증언하였습니다. 바바로는 그런 증언으로 평생 쌓아온 명예를 잃고, 막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것을 각오하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바바로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는지 자신에게 계속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도 제가 노력하고 있는 부분입니다”(윤재윤, <잊을 수 없는 증인>, 나무생각, p.158-161 요약).

오늘이 제헌절이니 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김홍섭 판사는 1950-60년 대에 많은 이들에게 존경 받았던 분입니다. 그는 ‘한 법관의 심정’이라는 글에서 남의 잘잘못을 가려내야 하는 자기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피고인의 처지에 연민을 던지거나, 법관이라는 자부심을 품기 이전에 법복 아래로 들여다보이는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며 흔들리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내심을 꿰뚫어볼 역량도, 그들을 승복시킬 만한 도량도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여 늘 동요하곤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피고인들을 그저 죄인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다 해도 그 또한 행복을 원하는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은 누구에게나 대견한 것이다. 간지奸智를 부리다가 제 꾀에 걸려 넘어진 자에게도 밉다고만 볼 수 없는 일면이 있겠거든, 어찌할 수 없는 힘에 압도 유린당한 패배자들 앞에, ‘좋은 법관’이기 전에 또는, 그와 동시에 ‘친절하고 성실한 인간’이어야겠다고 나는 때때로 생각하여보는 것이다.”(김홍섭 수상집, <無常을 넘어서>, 바오로딸, p.210)

남을 함부로 심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라는 말 속에 담긴 뜻이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런 따뜻함과 친절함과 성실함을 잃고 있습니다. 믿는 이들이 먼저 제 역할을 다 해야 할 때입니다

• 해야 할 일
주님은 이제 믿음의 사람들이 꼭 해야 할 일을 두 가지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용서입니다. 심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를 사랑으로 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는 받아들임입니다.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자리에 서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논어 위령공 편에서 자공이 공자님께 여쭙습니다. “한 말씀으로서 종신토록 행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대답합니다(위령공편 제15장 23, 성백효 번역). 용서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내게 해를 끼친 이에게 되갚아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용서의 마음에 이르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적 당위를 들이대며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가해자가 희생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이며, 정의에 대한 모욕”이라며 “그러한 범죄를 쉽사리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본질적인 악의 문제를 희석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부인하기 어려운 진실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인정과 참회 더 나아가 배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참회하지 않았는데도 용서할 수 있나요? 우리는 조건 없는 용서가 참회를 가능하게 할 때도 있음을 압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은 당신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그냥 받아들이셨습니다.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고 다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이 말 속에 담긴 따뜻함이 베드로 속에 있던 얼음을 녹였습니다.

그러나 완고하게 자기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보면 천불이 납니다. 우리 속에서 아물어 가던 상처가 다시 피를 흘립니다. 이런 경우 용서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라는 책으로 유명해진 랍비 해럴드 커슈너는 용서란 “슬픔을 벗어던지는 것인 동시에, 더 중요하게는 희생자로서의 역할을 벗어던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죄 지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스스로를 더 괴롭히는 일이고 자신을 분노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기에, 그가 나를 희생자로 규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용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실천할 때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남에게 주어라.” 남에게 무엇을 주라는 것일까요?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물질을 나누는 것은 기본입니다. 거기에 더해야 할 것은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입니다. 일곱 가지 죄의 뿌리 가운데 하나인 ‘인색’은 물질을 다랍게 아끼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주는 일을 실천해본 이들은 누구나 고백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행 20:35). 하나님은 잘 주는 이에게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서, 너희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도로 되어서 주실 것”(눅 6:38)입니다. 이 표현은 곡물을 거래할 때 주인의 넉넉한 인심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푸진 사랑이 그러하다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이웃의 눈에 어린 눈물은 가끔 하늘을 비추어주는 렌즈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기에 일쑤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자기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큰 세계를 자꾸 바라보아야 우리 정신이 커집니다. 심판하고 정죄하는 태도만 내려놓아도 우리는 평화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용서하고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을 통해 우리 삶은 수직의 중심을 얻게 됩니다. 무더운 여름, 우리의 삶이 그렇게 성숙해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7월 17일 10시 31분 5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