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해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의 눈을 누가 뜨게 하였다는 말은,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바깥으로 내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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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어버이주일을 맞은 이 땅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 위에 주님의 강건케 하시는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 서로를 귀하게
지난 수요일은 어버이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은 어린이 날이었습니다. 자녀와 어버이에 대한 시 중에 칼릴 지브란의 <자녀에 대하여>란 시가 있습니다. 제목은 ‘자녀에 대하여’이지만 주된 내용은 부모됨에 대한 것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그대의 아이들은 그대의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이란 생명 그 자체를 갈망하는 참 생명의 아들딸이다.
아이들은 당신을 거쳐서 왔을 뿐 그대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당신과 함께 지내더라도 그대에게 소유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으나 그대의 생각까지 주려고 하지 말라.
아이들에게는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
그대는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수 있으나 영혼의 집은 줄 수 없다.
아이들의 영혼은 그대가 꿈에서 조차 갈 수 없는 ‘내일’이라는 집에서 살고 있다.
그대가 아이들과 같이 되려고 애쓰는 것은 좋으나아이들을 그대와 같이 만들려고 애쓰지는 말라.
생명은 뒤로 퇴보하지 않으며 결코 어제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대는 그대의 아이들이 살아있는 화살처럼 앞으로 날아가게 하는 활이다.
활 쏘는 이는 무한이란 길 위에 놓인 과녁을 겨누고
힘껏 당신을 구부려 그의 화살이 빠르면서도 멀리 날아가도록 쏜다.
그대는 활 쏘는 이의 손에 의해서 구부러짐을 기뻐하라.
그는 날아가는 화살을 사랑하는 만큼이나 굳건한 활 또한 사랑하신다.
부모들은 자주 아이들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가치관을 복사하듯 주입하려하고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서 왔을 뿐 부모의 소유일 수 없다고, 그러니 아이들을 자신과 똑같이 만들려 하지 말라. 아이들이란 하나님께서 무한의 세계 속으로 쏘아올리시는 화살이고, 부모는 그 화살을 쏘기 위해 구부리시는 활이라고, 그러니 아이들을 위해 구부러짐을 기뻐하고 그 구부러짐을 굳건히 감당하라고.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에서 부모에 의해 행해지는 아동학대 발생률은 생각보다 높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신고율은 낮지만 자녀에 의해 행해지는 노인학대 또한 끝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권면은 마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권면처럼 들립니다. 이 땅의 부모들이 시인의 권면처럼 자녀를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딸로 귀히 여기며, 부모가 겨누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겨누신 세계로 아이들이 날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힘껏 기쁘게 구부리며 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자녀들을 위해 평생 고생하시고 당신의 생을 기꺼이 구부리며 사시다가 정말로 몸이 둥글게 굽어버리신 부모님을 귀히 여기고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하나님께 속한 귀한 생명으로 여겨야 한다는 시인의 권면을 부모자식 관계에 한정지어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겠습니다. 서로를 하나님께 속한 귀한 생명으로 여기는 태도는 모든 타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여야 합니다. 코로나 이후 최근 1,2년 사이에 강도 폭행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가 큰 폭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 타자를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 실로암의 기적
오늘의 성경본문인 요한복음 9장의 말씀은 소위 실로암의 기적에 대한 말씀입니다. 날 때부터 눈먼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길목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하며 연명했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죄인이거나 그의 부모가 죄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도 그의 부모도 죄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눈에 진흙을 발라주셨고, 그에게 실로암 연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는 실로암에 가서 진흙을 씻어냈고 눈이 밝아졌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를 알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해서 눈을 다시 뜨게 되었는지 궁금해했고, 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 사건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율법을 중시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진흙을 개어 눈에 발라준 행위, 치료 행위가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안식일 법을 어긴 것으로 보았을 때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일 리가 없다고 단정지었고, 예수를 아예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가 정말 날 때부터 눈먼 자였다가 보게 되었는지 믿을 수 없어서 그의 부모를 불러다가 심문했습니다. “이 사람이,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당신의 아들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부모가 답합니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또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해주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분명 아들에게서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저 모른다고만 말했습니다. 그 부모의 마지막 발언은 이것이었습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 부모의 마음속에 분명, 눈멀었던 자기들의 아들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아들을 고쳐주신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모는 그런 말을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에게서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 부모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공동체에서 쫓아내기로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태도는 대단히 폭력적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정해놓은 틀 밖의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만 폭력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폭력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정해놓은 틀 밖에서 활동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정죄했습니다.
그 부모를 통해서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없었던 바리새인들은 눈멀었던 사람을 다시 불러 심문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정죄부터 시작합니다. “그는 죄인이다.” 예수가 너의 눈을 뜨게는 해주었지만, 그는 율법을 어긴 죄인이니 그에 대해서 좋게 말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발끈하여 답했습니다. 그의 긴 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 못 보던 제가 그분 덕에 보게 되었는데 그가 죄인이라고요?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은 듣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사람의 말은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았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이었습니다. 태어나 보니 앞을 볼 수 없었고, 사람들은 그의 아픔을 죄라고 그의 존재를 죄인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해 주셨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그의 아픔에 직접 손을 대셨고 그가 죄인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고,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사람에게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면 과연 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겠습니까?
•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눈멀었던 자가 본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본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사람에게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습니다. 눈멀었던 자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에게서 온 사람의 모습을 보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 죄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누가 예수님을 바르게 보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눈멀었던 자가 예수님을 바르게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일까요? 그들은 그 누구보다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수백 개의 율법조문을 외우고 일반인은 실천하기 어려운 금식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몇 곱절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율법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랑하던 이들은 어느새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율법이 되었습니다. 절대적 존재가 된 것입니다. 절대로 모든 것을 알고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이 모든 것을 알고 판단할 수 있다 생각하는 것부터가 죄고 폭력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요9:39,41)
성경은 눈먼 자가 눈을 씻고 다시 보게 된 연못, 실로암의 뜻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보냄을 받았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바로 실로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분이라는 것을 믿을 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모든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귀한 생명임을 볼 수 있어야 제대로 보는 것이며 그럴 수 있을 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예수님이야말로 바로 그런 눈으로 모든 생명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 병자와 이방인과 세리를 죄인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과 다른 눈으로 그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귀한 존재, 하나님의 아들딸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런 사람들을 귀한 존재는커녕 죄인으로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실로암 연못에 눈을 씻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본다고 자부했지만 실상 그들은 눈 뜬 눈먼 자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생명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귀한 존재라는 하나님 나라의 기초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인 5월 17일은 권정생 선생님의 17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어린이 동화, <강아지 똥>으로 유명하신 분이시지요. <강아지 똥>은 강아지 똥같이 하찮은 것도 아름다운 민들레를 꽃 피울 수 있는 귀한 거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권 선생님은 그 동화 이야기 그대로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며 사셨습니다. 일제시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거지가 되어 살기도 했지만, 결코 비굴하게 살지는 않으셨습니다. 어려서 얻은 질병으로 죽을 때까지 고생하셨지만 밝음과 명랑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16년간 교회에서 종치기로 살면서 그 누구보다 진실하게 주님을 섬겼습니다. 추운 겨울날에는 자기의 이불 속에 찾아들어온 생쥐도 내쫓지 않으실 정도로 뭇 생명을 귀히 여기셨습니다. 동화작가가 되어 많은 돈을 벌게 되셨지만 그것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시지 않고 모두 굶주리는 북한과 어려운 나라의 어린이를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예수님의 눈, 실로암에 씻은 눈, 모든 생명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귀한 생명으로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러기에 이름 그대로 정생, 바르게 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눈은 오염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귀한 생명을 귀한 생명으로 보지 못합니다. 나의 욕망충족의 대상이나 나의 감정을 쏟아낼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가 지닌 가치를 그 가치대로 보지 못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기준대로 쉽게 판단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이웃을 보는 이에게는 복된 말이지만, 바리새인의 눈으로 이웃을 보는 이에게는 심판의 말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질 급한 어부 베드로를 하나님나라의 반석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매국노 세리장 삭개오를 순수한 자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하고 허물 많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보셨습니다. 눈멀었던 자처럼 우리도 예수님이라는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읍시다. 서로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봅시다. 모든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귀한 생명으로 바라봅시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귀한 생명이 우리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을 향해 날아갈 수 있도록 우리의 몸과 기준을 기꺼이 구부리며 삽시다. 새로운 한 주간도 주님이 주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