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3. <송구영신 예배> 두려움을 넘어
설교자 김기석
본문 창 32:9-12
설교일시 2016/12/31
오디오파일 s20161231.mp3 [10684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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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을 넘어
창32:9-12
(2016/12/31, 송년 감사)

[야곱은 기도를 드렸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고향 친족에게로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저에게 약속하신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종에게 베푸신 이 모든 은총과 온갖 진실을, 이 종은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이 요단 강을 건널 때에,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만, 이제 저는 이처럼 두 무리나 이루었습니다. 부디, 제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저를 건져 주십시오. 형이 와서 저를 치고, 아내들과 자식들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너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너의 씨가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도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 세모 회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한 해의 종착역에 도착했습니다. 그 세월을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보호하시는 주님의 손길과, 지칠 때마다 손을 잡아준 곁님들 덕분이었습니다. 저의 한 해가 딱히 힘겨웠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간 속을 뚫고 걸어온 과정이 고단하기는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찬송가 338장을 자꾸 흥얼거리게 되더군요.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아기 원합니다"(2절). 어쩌면 하나님께서 헛헛한 제 영혼으로 하여금 이 찬송을 부르게 하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즈음 손택수 시인의 '탕자의 기도'가 제 기도가 되고 있습니다. 시인과 예언자는 사람다운 삶을 상기시키라고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삶을 성찰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시인의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나무는 종교가 없는데도 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여러 종교를 가져보았지만
단 한번 기도다운 기도를 드린 적이 없다

풀잎은 풀잎인 채로, 구름은 구름인 채로,
바람은 바람인 채로 이미 자신이 되어 있는데
기도도 없이 기도가 되어 있는데

사람인 나는 내가 까마득하다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타향살이다"

시인은 종교를 가지고 살았다고는 하지만 기도다운 기도를 드린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풀잎과 구름과 바람은 굳이 기도를 드리지 않아도 자기 자신이 되어 사는 데, 사람인 자기는 영 참된 사람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인 나는 내가 까마득하다". 저는 이 마음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생이란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타향살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세월이 간다고 하여 삶이 명료해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건 시인의 엄살이나 비관이 아니라 삶의 엄정함에 대한 바른 인식입니다.

삶에 정답은 없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에 응답하며 살아갈 따름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부끄러움이나 잊지 않고 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부끄러움은 남에게 숨겨야 할 것이 드러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만, 시인이 말하는 부끄러움은 그런게 아닐 겁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번번이 실패하는 것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부끄러움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참 삶의 자리로 인도하곤 합니다. 부끄럽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을 구합니다.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1944년 세밑에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쓴 기도 시를 자꾸 읽었습니다. 절망의 어둠이 그와 가족들을 감싸고 있던 그때 그가 쓴 시의 일부입니다.

"묵은 해가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고,/괴로운 날들의 무거운 짐이 우리를 누르려 하니,/오오, 주님, 우리의 놀란 영혼에/우리를 위해 행하신 구원을 베푸소서"(디트리히 본회퍼, <옥중서신-저항과 복종>, 김순현 역, 복있는사람, 2016년 9월 19일, p.391)

삶의 회한이 없을 수는 없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은총의 손길에 우리의 묵은 해와, 괴로운 날들의 무거운 짐을 맡겨야 할 때입니다. 출애굽기 33장은 모세가 하나님의 등을 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등'을 어떤 실체로 생각하실 분은 없으시겠지요? 등은 은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는 대개 알아뵙지 못합니다. 가장 절박한 시간에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위기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셨음을 자각합니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자각은 언제나 사후에 찾아옵니다. 어렴풋하나마 저는 지금 하나님의 등을 보고 있습니다. 그 든든한 모습 속에서 저는 위안과 희망을 얻습니다.

•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를 때
한 해의 마지막 날 저는 야곱이라는 한 인물이 일평생 직면해야 했던 두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의 삶은 갈등의 연속이었습니다. 성경은 그가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쌍둥이 형제인 에서와 다퉜다고 말합니다. 태어날 때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고 하여 그의 이름이 야곱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다', '속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야아케브'에서 온 말이라고 합니다.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짓는 부모가 있나요? 그의 이름은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후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의 변신 이야기가 야곱 이야기의 핵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에서는 날쌘 사냥꾼이어서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성격이 차분했던 야곱은 주로 집에 머물렀기에 어머니 리브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씩씩하고 활달하게 살아가는 에서는 말 그대로 들사람이었고, 광야에 던져져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차남인 야곱에게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을 겁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장자인 에서의 특권을 하나하나 물려받거나 탈취합니다. 그는 사냥터에서 돌아와 허기에 시달리고 있던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과 빵을 주고 장자권을 물려받았습니다. 동화적인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역사의 주도권이 수렵인들로부터 농경인들에게 넘어가는 과정을 암시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나중에 야곱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에게 돌아갈 아버지의 축복을 대신 받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형이 동생을 섬길 것"(창25:23)이라는 신탁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야곱에게 두 번씩이나 속은 에서는 아버지 이삭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고 나면 동생을 죽이겠다고 다짐합니다. 형제간의 피바람을 피하게 하려고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외갓집이 있는 밧단아람으로 보냅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20년을 보내며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재산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는 달아나듯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고향은 김준태 시인이 노래하듯 넘어지거나 자빠지더라도 풀과 흙이 안아주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동생 야곱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는 에서가 버티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두려움을 벗어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하나임에서 형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자기가 돌아오고 있음을 알립니다. 심부름꾼은 에서가 부하 사백 명을 데리고 야곱을 치려고 이리로 오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야곱은 가족과 가축을 두 패로 나눕니다. 에서가 한 쪽을 치면 다른 쪽이라도 피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불안이 가시질 않았습니다.

• 브니엘의 아침
그는 그때서야 돌베개를 베고 자던 중 그에게 현신하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기억해냅니다. 땅과 자손을 주시겠다는 약속, 어디를 가든지 지켜 줄 뿐 아니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그는 비록 고생스럽기는 했지만 자기가 지금까지 누리고 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는 그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없었음을 진실되게 고백합니다. 아마 그 고백 속에는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 하에 다른 이들의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만들었던 삶에 대한 자책도 내포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는 형 에서의 노여움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후에 벌어진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얍복 나루에서 벌인 천사와의 절박한 씨름, 그리고 엉덩이뼈의 위골, 그리고 축복의 요청. 그날 밤에 옛 사람 야곱은 죽었고 새로운 존재인 이스라엘이 탄생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남의 발목이나 잡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절름거리는 다리는 그의 옛 자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사람은 그 밤에 죽었습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누군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침 해가 밝아오자 그는 그곳을 '브니엘'이라 칭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죽자 비로소 하나님이 보인 겁니다. 베델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도 야곱은 새 사람이 되지 못했습니다. 밧단아람에서의 20년 세월도 그를 진정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얍복강 나루에서의 경험을 거쳐 그는 마침내 하나님과 만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를 향해 나아가며 몸을 굽혀 절을 합니다. 비굴한 몸짓이 아니라 형 에서와의 화해를 바라는 그의 진실함의 표현이었습니다. 형 에서도 절름거리며 걷다가 땅에 엎드리곤 하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그동안의 적대감을 내려놓습니다. 연민과 사랑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두 형제는 서로 목을 끌어안고 함께 울었습니다. 아름다운 화해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에게 한 말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창33:10b).

오늘 하루 해가 다 가기 전에 우리도 이런 아름다운 화해를 이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적대감이 넘치는 세상을 따뜻한 환대의 공간으로 바꾸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을 이제 잠시 내려놓고, 주님의 선하신 권능을 맛볼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12월 31일 12시 25분 1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