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46. 다윗과 나단
설교자 김기석
본문 삼하 12:1-6
설교일시 2016/11/13
오디오파일 s20161113.mp3 [1345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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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나단
삼하12:1-7a
(2016/11/13)

[주님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나단은 다윗을 찾아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부유하였고, 한 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그 부자에게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다가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 어린 양을 자기 집에서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 어린 양은 그의 아이들과 함께 자라났습니다. 어린 양은 주인이 주는 음식을 함께 먹고, 주인의 잔에 있는 것을 함께 마시고, 주인의 품에 안겨서 함께 잤습니다. 이렇게 그 양은 주인의 딸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를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데, 자기의 양 떼나 소 떼에서는 한 마리도 잡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가난한 사람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자기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접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부자가 못마땅하여, 몹시 분개하면서, 나단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살아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또 그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마땅히 그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합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벼랑을 향해 내달리는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지난 한 주간도 우리는 평화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안식 없는 세상에서 바장이느라 우리 숨결이 거칠어졌습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위태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많고, 무능하고, 남의 말을 경청할 줄 모르는 권력과 그에 기생하여 이득을 취하던 이들을 이어주던 끈들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사람들은 분노와 아울러 허탈감을 느낍니다. 정치권, 재벌, 언론, 법조계, 교육, 의료계, 종교를 가릴 것 없이 속속들이 썩었습니다. 불의한 이들이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자기들의 잇속 차리기에 집중하느라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정직한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애써온 사람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들은 자기들만의 리그를 형성해서 살고 있습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 미가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망한다! 그들은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이다.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미2:1-2).

이런 와중에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는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여성, 이민자, 유색인종, 무슬림, 성소수자들에 대해 적대감과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던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곳으로 변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중은 선거에서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힘있는 이들만 잘 사는 세상에 대한 분노가 컸습니다. 미국인들은 그런 상황을 뒤흔들어줄 사람을 고용했습니다. 그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즈음의 현실을 보면서 귀신에 들려 비탈길을 내리달리던 돼지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통제되지 않는 어떤 거친 열정이 사람들을 온통 사로잡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대체 이 세상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질주하는 돼지떼에 짓밟혀 이리저리 찢기고 말 여린 존재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윗과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통해 종교와 권력이 어떻게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 죄는 죄를 낳고
전쟁이 빈번하던 시대, 다윗은 부하 장수들과 야전을 누비던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그는 용사요 전략가였지만, 하프와 시에 능한 사람이었고, 부하들을 진심으로 아끼던 사람이었습니다.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이후에도 그는 전쟁터에 나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서 부하들은 다윗의 참전을 말렸습니다. 왕이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겠지요. 그른 말은 아닙니다. 우기가 지나 봄이 되면 왕들은 전쟁을 치르곤 했습니다. 다윗은 요압을 군사령관으로 삼아 출전시키고 궁궐에 남아 있었습니다. 모처럼 느긋하고 나른한 평화를 누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혹은 언제나 그런 때 찾아옵니다.

오수를 즐긴 후 궁궐 옥상을 거닐던 그는 한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다윗은 신하를 보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하였습니다. 다녀온 신하가 "그 여인은 엘리암의 딸로서,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남의 아내입니다. 하지만 한번 불붙은 다윗의 욕정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11장 4절은 "그런데도"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순리가 아님을 알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잘못된 일에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가인의 형제 살해 이후 죄악이 관영해가는 세상을 묘사하면서 창세기 기자가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창6:2)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남보다 우월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특권층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C. Westermann)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봅니다. 채홍사(採紅使)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조선 조 연산군 때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하기 위해 지방으로 파견된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채홍사들은 사대부나 상민, 기혼자든 미혼자든 가리지 않고 예쁜 여자들을 잡아다 연산군에게 바쳤습니다. 가정이 해체되는 일 따위는 그들의 안중에 없었습니다. 오직 권력자의 비위나 맞췄습니다. 이게 타락한 권력의 특색입니다. 똑같은 일이 다윗의 왕실에서도 벌어졌습니다. 민중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던 다윗도 한 순간에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출신의 충직한 부하 장수 우리야의 아내라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그 여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겁탈한 겁니다.

성경의 이야기꾼은 이 참담한 이야기를 아주 압축적으로 들려줍니다. 밧세바는 곧 집으로 되돌아갔고, 얼마 뒤 임신했다는 소식을 다윗에게 전합니다. 다윗은 즉시 사람을 요압에게 보내 우리야를 왕궁으로 보내라 이릅니다. 자기의 범죄 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작전에 나선 겁니다. 다윗은 전선에서 돌아온 우리야에게 요압과 군인들의 안부를 묻고 싸움터의 형편도 물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말합니다. "이제 그대의 집으로 내려가서 목욕을 하고 쉬어라"(11:8). 다윗은 먹을 것도 함께 보냈습니다. 무슨 의도인 줄 아시겠지요?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물론이고 상관과 부하들이 모두 전선에서 수고하고 있는데 홀로 편안함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한 다윗은 우리야로 하여금 하루 더 머물도록 한 후에, 그를 궁으로 불러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했습니다. 취기가 올라 그의 판단력이 흐트러지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녁 때가 되어도 우리야는 집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다윗은 요압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서 우리야 편에 보냈습니다. 편지는 우리야를 가장 전투가 치열한 곳으로 보내 그가 죽게 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윗의 소원대로 우리야는 성 가까이서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습니다. 우리야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병졸들이 죽었습니다. 요압은 그 소식을 즉시 왕에게 전했습니다. 왕은 요압의 작전 실패를 꾸짖기보다는 한 번 실수는 병가의 상사라는 논리로 그를 격려했습니다. 죄는 죄를 낳고, 거짓은 또 다른 거짓을 낳는 법입니다. 그렇게도 믿음직했던 다윗은 파렴치한 범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위임된 권력을 더 큰 죄를 짓는 일에 활용했습니다. 참 기가막힌 전락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죽음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안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윗은 애도하는 기간이 지나자 사람을 보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가 아내로 삼습니다. 아들도 태어났습니다.

• 위험을 무릅쓰고
다윗은 행복했을까요?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그가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모든 일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 말입니다. 성서의 이야기꾼은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다윗이 한 이번 일은 아주 악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을 보시는 분이고, 세상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와 땅에서 들려오는 아벨의 피의 외침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일을 바로잡기 위해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다윗 곁에 머물면서 늘 하나님의 뜻을 전하던 나단을 보내심니다. 그는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중개하는 역할을 감당하던 선지자로서 다윗이 가장 크게 의지하였던 사람입니다. 왕의 측근 중의 측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단은 왕의 호감을 사기 위해 하나님의 메신저로서의 사명을 저버릴만큼 유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권력자에게 달콤한 말만 하는 환관적 신하와는 아주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체제의 하수인이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엊그제 만난 문장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진리 안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현실과 불화하고 현실에 대항한다. 진리에 잇닿아 있는 자는 어찌할 수 없는 저항자로 산다"(바츨라프 하벨, <불가능의 예술>, 이택광 옮김,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 2016년 6월 1일, p.296; 박영신 교수의 '해제' 중에서).

나단은 다윗에게 가서 마치 한담을 늘어놓듯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어떤 성읍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양과 소가 아주 많은 거부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해서 겨우 암양 한 마리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리에 불과했기에 그는 양을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그 집의 아이들에게 그 양은 식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에게 나그네 한 사람이 찾아오면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인색했던 부자는 자기 짐승을 잡아 대접할 생각이 없었기에,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강탈해다가 나그네를 대접했습니다. 불의한 세상 현실이 고스란히 반영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거기에 이르자 다윗은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서 맹세하지만, 그런 일을 한 사람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또 그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 그는 마땅히 그 어린 암양을 네 배로 갚아 주어야 합니다."(12:5-6)

'마땅히'라는 말이 거듭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땅하다'라는 단어는 그렇게 하는 게 옳다, 당연하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다윗은 자기가 지배하는 땅에서 그런 파렴치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을 살피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 눈은 바깥은 잘 살피지만 자기 속은 잘 살피지 못하는 법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의 한 대목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모처럼 만난 친구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만 한 친구의 렌즈가 뒤로 돌아가고 말았더랍니다. 당사자는 심각한데, 친구들은 그 상황이 너무 우스운 나머지 박장대소를 하면서 '네 속을 좀 잘 살펴보라'는 뜻이라고 해석했다고 하더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남의 허물은 잘 들추어내면서도 자기의 허물은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남의 눈에서 티끌을 빼주겠다고 덤비는 것이지요.

나단은 다윗을 향해 웃음기 없는 얼굴로 준엄하게 말합니다.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12:7). 나단은 좋은 말을 고르기 위해 우물쭈물 하지 않습니다. 비수처럼 예리하게 다윗의 허위의식을 찌릅니다. 부드럽게 번역되긴 했지만 실은 더 직정적이었을 겁니다. 왕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왕 앞에 섰습니다. 히브리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정말 놀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히4:12).

하나님이 예언자를 왕에게 보내신 것은 왕을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회개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사색이 된 왕을 보며 나단은 폭포처럼 그의 죄를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여긴 죄', '하나님이 악하게 여기는 일을 한 죄', '하나님을 무시한 죄'. 죄에는 벌이 따르는 법입니다. 그의 집안에는 싸움이 그치지 않을 것이고, 부끄러운 일이 끊이지 않고 벌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교란 이런 것입니다. 감싸 안을 땐 감싸 안아야 하지만 꾸짖을 땐 매섭게 꾸짖어야 합니다. 얼마 전 종교계를 대표한다는 이들이 청와대에 불려 들어가 평소에는 잘 보여주지 않던 인자한 미소만 짓고 돌아왔습니다. '꾸짖지 못하는 종교', 권력자의 눈치나 살피는 종교는 하나님께 역겨운 것입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광장에 나섰습니다. 다윗은 자기 죄를 시인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이런 데 있습니다. 죄를 전혀 짓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죄를 자각하는 순간 돌이킬 용기가 있다는 것 말입니다.

• 돌들의 외침
오늘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는 권력형 비리와 비선 실세들에 의한 국정 농단을 가리기 위해 권력기관에 있는 사람들은 자꾸만 또 다른 거짓을 지어내려 합니다. 이제는 진실을 밝혀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자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외치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눅19:38) 하고 외쳤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제자들을 꾸짖으라며 예수에게 항의합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 하셨던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19:40). 맥락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돌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올 때면 역사의 격변기임이 분명합니다.

다윗은 나단의 말을 경청했기에 파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나단 덕분에 다윗은 '우상'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나단은 왕의 노여움을 사 목숨이 위태롭게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또렷하게 전함으로 청사에 참 예언자로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위협을 받고 있는 이 시대에 종교는 그 가르침의 근본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라 해도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의 살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 불의의 민낯을 폭로해 역사의 엄정함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최우선의 관심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아니라 우정이, 경쟁보다는 협동이, 적대감보다는 환대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자꾸 상기시켜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고 어지럽다 해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께 늘 감사의 찬양을 올리며 사시길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11월 13일 10시 21분 5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