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0. 의로운 사람, 요셉
설교자 김기석
본문 마1:18-25
설교일시 2016/12/11
오디오파일 s20161211.mp3 [1513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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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사람 요셉
마1:18-25
(2016/12/10, 대림절 제3주)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시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대림절 세번째 촛불을 밝혀놓고 우리는 어둠이 물러가기를 기다립니다.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결정을 보며 어떤 이들은 안도했고, 어떤 이들은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 먼 훗날 역사가는 2016년을 어떻게 기록할지 궁금합니다. 전국 대도시의 거리에서 여러 주에 걸쳐 펼쳐진 평화로운 집회가 세상을 바꾸어놓았다고 기록할까요? 그것은 그날 이후 우리가 단호하게 평화의 길을 선택하고, 돈이 아니라 생명가치가 중심이 된 세상을 이루기 위해 헌신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 과정이 녹록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다들 그렇겠지만 대림절기를 지나면서도 한동안 마음에 고요함이 없었습니다. 뭔가에 집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책도 잘 안 읽히고, 기도도 묵상도 잘 안 됐습니다. 영혼이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고요한 새벽녘, 어지럽게 흩어지는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비끄러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곤 했습니다.

정현종 시인의 '시선을 기리는 노래'가 제게 길잡이가 되어 주었습니다. "멀리 있는 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까이 있는 것과 살 수 있겠는가.//바라보는 저 너머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서 살 수 있겠는가". 시인은 우리가 가까이에 있는 것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고단하고 신산스러운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것은 '저 너머'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저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도록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그러하고, 어지럽게 전개되는 역사의 추이가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잠시 멈추어 서서 우리 시선을 '저 너머'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믿음을 일러 '먼 빛의 시선'이라 말했습니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우리가 당장 애면글면하는 일들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저는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나 메일에서 분주하더라도 가끔 한눈을 팔며 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래야 현실의 무게에 붙들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이들은 현실의 암담함에 짓눌리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 사도가 한 말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9)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자꾸 들어올릴 때, 우리 시선을 먼 데 둘 때 하늘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옵니다. 정현종 선생은 "여기 있으면서 항상 다른 데에도 있을 수 있게 하는 시선이여.//움직이지 않지만 항상 떠날 수 있게 하는 시선이여."라고 시선을 기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시민인 동시에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런 자각이 우리를 나그네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 역사의 연결고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우리의 상식을 깨뜨립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도 그러합니다. 마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의 계보는 이러하다"(마1:1)라는 말로 시작된 그리스도 이야기를 족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누구를 낳고'라는 구절이 지리하게 이어집니다. 족보 이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마1:17). 사실 이 족보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8절에 요람이 웃시야를 낳았다고 되어 있지만 실은 그 사이에 아하시아-요아스-아마샤의 3대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14대라는 숫자에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14는 완전수인 7의 재수입니다. 마태가 그런 왜곡을 가한 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사의 여정이 예수님에게서 정점을 이룬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8절부터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간략하게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가 어떻게 요셉의 아들이 되어 다윗의 족보에 속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기에 얽힌 복잡한 신학적 논의를 소개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요셉'이라는 이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요셉은 히브리 성서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꿈쟁이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려 애굽에 내려갔다가 바로의 호감을 사 중용되었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야곱 일가가 애굽으로 이주했던 것도 요셉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창세기는 요셉의 죽음과 장례 이야기로 끝이 나고, 출애굽기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은 옛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주님 오시기 전과 후를 이어주는 연결고리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요셉은 오랫동안 중요 인물로 취급되지 못했습니다. 서양 미술사에서도 그는 늘 나이 많은 노인의 모습으로 형상화됩니다. 영원한 젊음을 간직한 것처럼 그려지는 마리아와는 대조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대림 시기에 요셉을 주목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태는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다고 말합니다. 유다의 전통에 따르면 약혼을 통해 두 당사자는 법적인 부부가 됩니다. 약혼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19)이라 칭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약혼한 사이라 해도 바로 함께 살지는 않았습니다. 신부는 일 년 동안 친정에 머물면서 아내로서의 역할을 익혀야 했습니다. 한미한 가정 출신의 여인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이 참 많았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는 <예수복음>이라는 책에서 당시 팔레스타인 여성들이 해야 할 일을 죽 열거하고 있습니다.

"양털에 빗질을 하고, 실을 잣고, 천을 짜고, 매일 아침 가족이 먹을 빵을 굽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커다란 물동이는 머리에 이고 다른 물동이는 등에 진 채 가파른 골짜기를 올라온다. 늦은 오후에는 샛길과 주위 들판을 돌아다니며 나무를 모으고 그루터기를 베고, 다른 바구니에는 쇠똥을 담고 나사렛의 위쪽 비탈에서 많이 자라는 엉겅퀴와 가시나무도 채워넣는다."(주제 사라마구, <예수복음>, 정영목 옮김, 해냄, 2010년 1월 20일, p.29-30)

참 고단한 일상이었을 겁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현실을 생각해 볼 때 마리아의 삶은 녹록치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 마리아의 마음을 달뜨게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셉 또한 마리아와 함께 살게 될 미래를 그려보며 고단한 일상을 견디고 있었을 것입니다.

• 의로운 사람
그런데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마리아가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는 일체 그런 이야기 없이, 그야말로 다짜고자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은 독자들의 당혹감을 자아냅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세계의 여러 건국 신화는 나라의 시조나 영웅들이 거품이나 알에서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로마를 세운 쌍둥이 형제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젖을 먹고 자랐다고 합니다. 대개 새로운 역사를 열어가는 이들은 자기 스스로 시조이기에 아버지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도 그런 건국신화의 맥락에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에는 조금 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로마제국이 통치의 편이를 위해 황제들을 신화화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옥타비아누스가 분열되었던 로마를 통일하고 명실상부한 지중해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로마의 사제 계급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어머니 아티아와 아폴론 신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말했습니다. 황제는 그로써 신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얻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을 로마 제국의 강압적인 통치와 대비되는 새로운 질서를 가져온 신적 존재로 소개하기 위해 생물학적 아버지를 지우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말이 갖는 중요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쨌든 요셉은 처음부터 지워진 존재입니다. 탄생 이야기와 애굽 피신 이야기에 잠깐 등장할 뿐, 그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 가족교회(Sagrada Familia)을 방문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정교하게 조각된 조형물, 자연광과 인공의 불빛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조명, 해의 각도에 따라 색채가 다르게 느껴지는 스테인드글라스는 화려하지만 난삽하지 않습니다. 1882년에 시작된 공사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예배당은 건물 자체가 놀라움을 안겨주지만, 그보다 신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요셉을 복권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성 가족교회를 설계하고 시공한 가우디(Antonio Gaudi, 1852-1925)는 요셉을 성 가족의 중심 인물로 내세웠습니다. 그것은 또한 노동의 신성함을 복권시킨 것이기도 했습니다. 성 가족 교회에 있는 '탄생의 파사드'에는 요셉이 일하는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망치를 들고 일하고 있는 그의 머리 위에는 분주히 날아다니는 일벌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가정을 돌보는 가장들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 심정의 쓰라림을 아마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겁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기 감정을 직정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마태는 그가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고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라는 구절과 '가만히'라는 단어가 요셉이라는 사람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타자 중심적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의로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새로운 역사의 초석입니다.

• 임마누엘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이라면서,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머지 않아 아들을 낳게 될 텐데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일렀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축약 형태인 예수아를 그리스식으로 음역한 것입니다. 그 이름은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천사는 그 아이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라는 이름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이 일이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서 일어난 일임을 입증하기 위해 이사야서를 인용합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곧 임마누엘이십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임마누엘, 이 한 마디 속에 예수의 탄생과 삶과 수난의 신비가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곤고한 생의 고빗길을 넘을 때, 가까웠던 사람들조차 다 떨어져 나가 지극한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도저히 살아갈 방도를 찾을 수 없어 자포자기적인 심정에 사로잡힐 때, 주님은 그때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까요? 저는 숙명여대의 김응교 교수의 책 제목인 '곁으로'라는 단어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는 문학이 서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사유하면서, 문학은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 곁으로 다가설 때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신학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는 세상에 의해 지워진 사람들, 투명 인간 취급받는 사람들, 죄인으로 규정되어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 늘 다가서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아픔의 자리, 눈물의 자리, 아우성소리가 들려오는 자리가 아닐까요? 지금 우리는 누구 곁에 다가서고 있습니까? 높은 자리를 탐하는 이들은 자기들에게 높은 자리를 줄 수 있는 이들 곁에 다가서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다리는 이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의 모습으로 오시는 주님은 저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요셉은 가장 취약한 상황에 처했던 마리아를 감싸 안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습니다. 15절에 나오는 "예수라고 하여라"라는 명령과 18절에 나오는 "예수라고 하였다"라는 실행이 서로 상응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빕니다"(눅1:38) 하고 간구했던 마리아가 신앙의 모범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이 순종의 모본입니다. 가장 취약한 자리에 선 사람을 사랑으로 감싸안는 외투와 같은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예수는 그런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을 통해 이 땅에 오고 계십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의 품이 커져서 상처입은 사람들, 고통받는 이들을 넉넉히 품어 안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6년 12월 11일 11시 03분 0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