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 아! 스데반
설교자 김기석
본문 행6:8-15
설교일시 2017/01/22
오디오파일 s20170122.mp3 [1376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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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스데반
행6:8-15
(2017/01/22, 주현 제3주)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그 때에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몇이 들고일어나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들은 스데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그리고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부추기고, 스데반에게로 몰려가 그를 붙잡아서, 공의회로 끌고 왔다.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쉴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뜯어 고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공의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

• 위기를 넘어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며칠 동안 미세먼지가 극심하더니 날도 추워졌습니다. 따뜻한 햇볕과 맑고 투명한 대기가 새삼 그리워지는 나날입니다. 흐리고 차가운 것은 대기만이 아닙니다. 정치인들과 권력을 농단한 이들이 빚어낸 혼돈을 보며 사람들은 탄식하기도 하고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냉소와 멸시의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이들이 많아졌습니다. 감정적 허용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끼어들기를 했다고 해서 자동차를 세우고 망치 같은 것으로 상대방의 차를 부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소한 일에도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이나 행동이나 모든 게 조심스럽습니다. 그런 예민함 때문에 사회가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측면도 물론 있지만, 삶이 좀 숨막히게 되는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사회적 갈등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기독교인들은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형성된 초대 교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의 모본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귀히 여기고, 각자의 필요에 창조적으로 응답하면서, 함께 있음의 기쁨을 한껏 누렸습니다. 이사야가 꿈꾸었던 이상 세계, 곧 이리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는 세상이 도래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운 순간은 지속되기 어려운 법입니다. 시적 도취의 시간이 지나면 산문적 현실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인간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공동체의 숫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문제도 다양해지게 마련입니다. 외적인 박해 속에서도 꾸준히 성장하던 초대교회에도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초대 교회라는 신생 공동체가 '허위 의식'을 얼마나 경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재산을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았지만, 일부를 자기들을 위해 떼어 놓고도 마치 재산의 전부를 바친 것처럼 꾸몄습니다. 그들의 급작스런 죽음은 사람들에게 큰 당혹감을 안겨 주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한 일이 죽을 만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는 그들의 죽음을 엄중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이 점점 불어나고, 구성원이 다양해지면서 또 다른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그 가운데 헬라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이들과 히브리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과부들에게 구제금을 나누어 줄 때 헬라파 유대인들이 차별 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제는 유대인들의 경건생활의 핵심이었습니다. 금요일이면 회당에 속한 사람 몇이 시장과 주택을 찾아다니며 기부할 물품들을 받아와 마을의 극빈자들에게 분배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도 그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단의 사람들이 차별을 받고 있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사실 헬라어를 모어로 하는 유대인들과 히브리어를 모어로 하는 유대인들의 갈등이 하루 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세계 각지를 유랑하며 살던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입니다. 오랜 기간 전통적 종교와 문화로부터 떨어져서 지냈기 때문에 그들은 유대인의 전통에 익숙하지 못했습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그런 그들을 다소 멸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런 차별적 시선 때문에 상처를 받았을 겁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이야말로 보편적인 세계문화에 훨씬 더 익숙하다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을 겁니다. 이런 숨겨진 갈등이 구제 문제로 인해 표면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불만을 적당히 엉너리쳐 넘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화해를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 자기들의 에너지가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집중되어 그런 일상적 문제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음을 인정하고는, 구제를 효율적으로 하는 데 필요한 인력을 뽑아달라고 회중에게 부탁했습니다.

• 일곱 집사
"그러니 형제자매 여러분 신망이 있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여러분 가운데서 뽑으십시오. 그러면 그들에게 이 일을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겠습니다."(행6:3-4)

우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섬기는 일에 헌신'하는 사도들의 직무가 구제를 전담하는 집사들의 직무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두 가지 다 거룩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구제 혹은 봉사의 일을 하게 될 사람들을 뽑는 조건이 몇 가지 열거되어 있습니다. '신망'이 있어야 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일을 능숙하게 잘 해낼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신망입니다. 우리도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만, 맡은 일을 능숙하게 잘 해내지만 사람들을 좀 불편하게 만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아가 강해서 다른 이들을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무리수를 두기도 합니다. 그들은 공동체에 불화를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일의 효율성만을 따진다면 그런 이들의 능력이 필요하지만 공동체의 평화는 깨지게 마련입니다.

또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받는 이들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다고 하여 늘 종교적 감격 속에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 속에 충만히 공급되어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들이 속해 있는 일상의 자리에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이해하고 기쁘게 감당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로 이끌어 주신 사람으로 대합니다.

그들은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혜는 지식과는 구별됩니다. 지혜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질서를 꿰뚫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식은 배워서 아는 것이지만 지혜는 깨우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얻는 것입니다. 지식은 많지만 지혜는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학벌 좋은 이들이 비루한 일들에 얽혀 들어갔다가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모르기에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이들은 당장의 필요나 이익에 따라 처신하기보다는 다소 굼떠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하늘의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갑니다.

초대교회는 그래서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를 뽑아 집사로 세웠습니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했습니다. 그들의 적절한 헌신 덕분일까요? 교회는 날로 든든하게 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퍼져 나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의 수가 부쩍 늘어가고, 제사장들 가운데서도 이 믿음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행6:7). 일곱 집사들은 구제의 일만 감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 또한 감당했습니다.

• 불편한 존재
스데반과 빌립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행6:8).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이 무엇인지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스데반이라는 인물의 감화력이 컸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늘 나쁜 일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이 스데반의 가르침을 두고 논쟁을 걸어왔습니다. '리버디노'는 '종으로 있다가 자유를 얻은 유대 사람들의 집단'입니다. 그들은 회복된 신분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더욱 전통에 충실하려던 것으로 보입니다. 양반 직첩을 산 사람들이 더욱 양반 행세를 하려는 심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의 지혜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앞서도 말한 것 같이 지혜는 학식이 아니라 인격이나 품성 속에 배어든 진정성 혹은 근원적인 세계와 잇대어 있음입니다. 근본에 충실한 사람을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이 스데반의 인품과 가르침에 마음을 열었더라면 그들은 더 큰 세계에 진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패배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들의 패배를 상기시키는 스데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어둠은 늘 빛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법입니다. 요한은 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를 맞아들이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도 그런 의미일 겁니다. 때로는 잘못된 종교적 신념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때도 있습니다. 다 그 고래 힘줄보다 질긴 자아 때문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의 비루함을 상기시키는 사람을 견디지 못합니다.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은 스데반을 모함하기로 작정하고는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부추기는 한편 스데반을 잡아서 공의회로 끌고 갔습니다. 자기 옳음을 강변하기 위해 거짓을 서슴치 않는 이들을 보십시오.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거짓 증언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쉴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을 합니다.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뜯어 고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행6:13-14)

성전을 모독하고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는 것은 유대 사회에서 치명적인 범죄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을 그렇게 죽음의 길로 몰아가려 했습니다.

• 아름다운 얼굴
그런데 15절은 그런 살기등등한 상황을 스데반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의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 박해의 태풍 앞에서도 스데반은 태연자약합니다. 누가는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 상황이 강요하고 있는 두려움도, 그를 모함하는 이들에 대한 증오심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 상상이 되십니까? 얼굴은 얼의 골짜기라지요? 얼굴에는 우리 내면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기게 마련입니다. 독살스런 얼굴, 탐욕에 찌든 얼굴, 슬픔에 찬 얼굴, 멍한 얼굴이 있는가 하면 해처럼 밝은 얼굴도 있습니다. 김흥호 목사님은 믿음을 가리켜 '안에 핀 꽃'이라 했습니다. 바깥에 핀 꽃은 때가 되면 시들게 마련이지만 안에 핀 꽃은 늘 빛이 날 거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빛나는 하늘에 뭇별이 반짝이듯 마음 속에 핀 꽃은 언제나 빛날 것이다. 마음 속에 피어 오른 아름다운 꽃, 꿈 속에 피어 오른 아름다운 깸, 꽃이 이 봄을 끌어들이고 꽃으로 피어 올라 삶은 기쁨이 되고, 사랑의 물을 주어 여름이 열리면 뜨거운 햇빛과 퍼붓는 소낙비에 잎은 무성하고, 지혜의 가을이 열리면 찬 서리에 열매는 무르익는다."(김흥호,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 까치, 1982년 11월 15일, p.90)

인생의 봄여름가을겨울을 지나면서 점점 성숙한 지경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또 있을까요? 함석헌 선생님은 '얼굴'이라는 시에서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참 얼굴 하나를 보고 가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참 얼굴은 이러합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가 있다면 이런 얼굴을 만나는 것, 아니, 우리 얼굴이 이런 얼굴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스데반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흔들리지 않는 내적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에 핀 꽃은 세상의 어떤 바람도 시들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스데반은 그 재판 자리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의 자리로 바꿔놓았습니다. 결국 그는 순교를 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순정하고 굳굳한 믿음은 박해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수많은 이들의 든든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거칠어져도 마음의 유연함을 잃지 않도록 애쓰십시오. 성령의 충만함 속에 머물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세상을 이기는 이들이 되십시오. 주님이 맡겨주신 일을 성심껏 감당함으로 우리 속에 믿음의 뿌리가 더욱 든든하게 박히게 만드십시오. 우리의 얼굴을 통해 이웃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할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1월 22일 10시 20분 5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