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송구영신. 믿음, 일치를 향한 모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 17:21-23
설교일시 2019-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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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일치를 향한 모험
요17:21-23
(2019/12/31, 송구영신예배)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당신 참 애썼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19년의 마지막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며칠 전 산청에서 사역하고 있는 성요한 신부님이 스스로 지어 부른 노래 한 곡을 보내주었습니다. 신부님의 고요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를 들으며 일단 그 가사에 빠져들었습니다.

“당신 참 애썼다/사느라, 살아내느라/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당신 참 애썼다”

노래는 마치 먼 길 걷느라 비록 지치고 남루해긴 했지만 그래도 잘 견뎠다며 우리 등을 토닥거려 주는 것 같았습니다. 찾아보니 이 노랫말은 정희재의 ‘당신 참 애썼다’라는 시의 마지막 부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시를 찾아 읽으며 세밑을 맞이한 우리 모두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아 뭉클했습니다.

“나는 이제 안다./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당신에게 눈물 차오르는 밤이 있음을//나는 또 감히 안다./당신이 무엇을 꿈꾸었고/무엇을 잃어왔는지를/당신의 흔들리는 그림자에/내 그림자가 겹쳤기에/절로 헤아려졌다.//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갔지만/끝내 가버린 버스처럼/늘 한 발짝 차이로/우리를 비껴갔던 희망들/그래도 다시 그 희망을 쫓으며/우리 그렇게 살았다.”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뎌내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조차 받아들여야 했던 눈물의 시간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우리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사라져도 우리가 여기 있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바닥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용기만 있다면 삶은 또 다른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할 겁니다.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이 갈마드는 것이 우리 인생의 풍경입니다. 뜻한 바대로 되었다고 우쭐거릴 것도 없고, 뜻이 좌절되었다고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날마다 일희일비 하며 사는 우리에게 전도서의 기자는 냉철한 지혜를 담아 이렇게 권고합니다.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전7:14). 좋은 일이 있을 땐 맘껏 기뻐해도 괜찮습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면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 어려움은 우리를 더 깊은 차원과 접속시켜 줄 것입니다.

∙우리가 선 자리
삶은 참 모호합니다.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새해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변화되었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조금 따뜻한 기운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참 거칠어졌습니다. 말도 거칠어지고, 행동도 거칠어졌습니다. 생명은 온기가 있어야 싹트는 법인데, 우리 사회의 온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마틴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관계를 맺는 능력이 점점 퇴화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가 내 삶에 다가오는 것을 기꺼이 허용하는 것이고, 나도 기대를 품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을 표하고, 함께 어려움을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나를 길들여 달라’고 부탁합니다. 어린왕자는 그렇게 하겠다면서도 “실은 나는 시간이 별로 없어. 친구들을 찾아내야 하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여우는 ‘사람들은 이제 무얼 알 시간조차 없어지고 말았다‘고 탄식합니다. 그러면서 친구가 갖고 싶거든 나를 길들이라고 말합니다. 방법을 묻는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말합니다. “아주 참을성이 많아야 해. 처음에는 내게서 좀 떨어져서 그렇게 풀 위에 앉아 있어. 내가 곁눈으로 너를 볼 테니 너는 암말두 하지 마라. 말이란 오해가 생기는 근원이니까. 그러나 매일 조금씩 더 가까이 앉아두 돼…“ 이튿날 다시 찾아온 어린왕자에게 여우가 말합니다. “같은 시간에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가령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하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을 느낄 거다. 네 시가 되면 벌써 안절부절을 못하구 걱정이 되구 할 거야. 행복이 얼마나 값있다는 걸 알아낼 거란 말이야. 그러나 네가 아무 때나 오면 나는 몇 시에 마음을 곱게 치장을 해야 할지 영 알 수가 없지 않아?” 그 말 끝에 여우는 관계에도 예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을 함께 보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삶이 힘겹다고 느끼는 까닭은 일이 고되기 때문이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향기 없는 시간’에 쫓기며 살기 때문입니다. 늘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재독 학자인 한병철 교수는 현대세계에는 ‘산책자도 방랑자도 없다‘면서 유유자적과 경쾌함이 사라진 자리에 조급함, 부산스러움, 불안이 자리를 잡는다고 말합니다. 발터 벤야민은 도시를 어슬렁거리며 걷는 산책자들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봅니다. “산책자의 無爲는 노동의 분업화에 반대하는 시위”라는 것입니다.

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사는 우리와 애굽에서 할당량을 채워야 했던 히브리인들의 처지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시간에 우리를 맡길 줄 모르기에 우리는 늘 시간에 쫓기며 삽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면서도 경탄할 줄도 모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우리 속에 있는 불안이나 헛헛함을 잠재워주는데, 아름다움을 누릴 생각이 없기에 우리는 더 조바심치며 삽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살라고 보내주신 이웃들을 함부로 대합니다.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은 내게 주어진 명령이라면서 그를 홀로 버려두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누군가를 아끼고 귀히 여기고 따뜻하게 맞아주려 할 때 오히려 우리 삶에 질서와 여백이 생기고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평안이 찾아옵니다. 삶의 근본이 무너지면 나머지도 다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함부로 살아 남루해진 시간을 속량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고 새로운 삶을 다짐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의 기도
요한복음 17장은 세상 떠날 날이 다가온 것을 직감하신 주님께서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바친 기도입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모든 일을 성심껏 수행함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렸다고 고백합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성심껏 감당함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것 말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남겨지는 제자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내다보면서 그들을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에 맡기는 기도를 드렸습니다(17:15). 예수의 사람들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낯선 존재들입니다. 힘이 정의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힘이 아니라 공감과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취급을 받거나 조롱거리가 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논리에 따라 살지 않기에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깁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기들의 양심에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제자들이 겪게 될 환난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16:33b). 주님의 기도가 우리를 붙들어줍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또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거룩을 뜻하는 ‘하기아조hagiazo’는 ‘구별되다‘, 혹은 ‘하나님께 봉헌되다‘라는 뜻입니다. 속된 것, 더러운 것을 하나님께 바칠 수는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수도사들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 덕이 있습니다. ‘가난’(poverty), ‘정결’(chastity), ‘순명‘(obedience)입니다. 이런 덕이야말로 인간의 자기 숭배의 해독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돈‘(money), ‘쾌락‘(sex), ‘권력‘(power)를 구합니다. 이것은 마치 유사 신처럼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돈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이웃이 사라지고, 성 혹은 쾌락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을 때 우리 속의 신성한 빛이 꺼지고, 권력욕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는 악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수도사들은 아니지만 새해에는우리도 가난, 정결, 순명의 덕을 향해 한 걸음씩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믿는 이들의 삶이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증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증언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됨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징표입니다. 증오와 갈등과 파당의 벽이 날로 높아가는 세상에서 누군가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참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선택해야 할 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당신의 관계를 하나됨의 모델로 제시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속에 있도록 하는 것이 성령의 일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밀함이 이 한 구절 속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서로에게 속하여 있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관계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에 대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지만 저는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라는 대목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나 좋을 대로 처신하지 않습니다. 그가 기뻐하는 일을 기꺼이 하려 합니다. 이게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초월하게 만드는 힘이요, 하나되게 하는 힘입니다.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상호 내주 혹은 사랑 안에 동참해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 일의 가시적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소비와 경쟁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가족’의 범주를 넘어 다른 이들과 일치를 이룬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우리는 ‘다른 세상’, ‘함께 사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삶으로 입증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떼제 공동체의 한국인 수사인 신한열 수사는 처음 떼제에 들어갔다가 느낀 당혹감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도 누렸지만 금방 어려움과 갈등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선배 수사에게 그런 속마음을 털어놓자 그는 ‘공동생활은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지 않으면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신한열 수사는 그래서 말합니다.

“공동체는 성격이나 취미 혹은 적성이 비슷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수도 공동체는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한 분’ 때문에 모여서 평생을 사는 곳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애써 외면한다면 언젠가는 아픔과 갈등을 겪게 될 것이다.”(신한열, 앞의 책, p.62)

우리는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한 분’의 꿈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입니다. 경계와 장벽이 날로 높아가는 세상이지만,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이해와 사랑, 용서를 연습해야 합니다. 자기주장을 앞세울 게 아니라 먼저 경청하려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합니다. 서로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서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서로 받아들이고 권면해야 합니다. 서로 용납하고 서로 순종해야 합니다.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서로 따뜻하게 대접해야 합니다. 서로 겸손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을 향해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돌보라고, 성차별을 철폐하라고, 경제 정의를 실천하라고, 평화를 추구하는 정치를 하라고, 기후 변화 문제에 대응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목표를 마음에 새기고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우리는 조금씩 따뜻한 사람이 될 것이고, 일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아름답고 멋진 모험에 기꺼이 동참하십시오. 가끔 목표를 잃어버릴 때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제든 기다려주고, 위로하고, 용납하여 주는 다른 지체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시간이 일치를 향한 아름다운 모험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9년 12월 31일 22시 44분 2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