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4. 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영광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 12:37-43
설교일시 202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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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 사람의 영광
요 12:37-43
(2022/04/03, 사순절 제5주)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징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한 말이 이루어졌다. "주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며, 주님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그들이 믿을 수 없었던 까닭을, 이사야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예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그가 예수를 가리켜서 한 것이다.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나,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회당에서 쫓겨날까봐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

• 어둠이 이기지 못하게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아름다운 4월의 아침입니다. 연녹색 물결을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주님이 걸으셨던 수난의 골짜기 깊은 곳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아주 급박하게 그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소생을 기념하는 잔치가 벌어지고 있을 때 마리아가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습니다. 그것을 일러 한 신학자는 ‘거룩한 낭비’(holy waste)라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드리고 싶은 그 마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신학교 시절 시인 김남조 선생님을 특강 강사로 모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향유를 주님께 부어 바친 그 여인의 마음 하나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시인으로서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향유를 부은 여인이 마르다의 자매인 마리아라고 말하지만, 마태복음(26:7)과 마가복음(14:3)은 그 여인을 그저 ‘한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누가복음은 7장 ‘죄인인 한 여자’(눅7:37)라고 말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기 언급된 여인과 8장 2절의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라는 구절이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확증편향입니다.

김남조 선생도 그런 통념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라는 시에서 선생은 그 여인을 가리켜 “일곱번의 일곱갑절/남자를 사랑해, 끝내 한사람의 영혼과도 못 만난 여자/어둡고 더 추워서/누구와도 다르던 여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주님을 얼마나 깊이 연모했는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눈물이며는/눈물에 감아 빗은 머리채며는/잘 비벼 적시는/甘松香油며는/아아 湯藥보다 졸아든 평생의 죄,/모든 참회며는/주님의 발에/간절히 한번만 닿아보게/허락하시올지”(金南祚 詩集, <同行>, 瑞文堂, 1980, p.64-65) ‘허락하시올지’라는 말 속에 담긴 염원이 절절하기만 합니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이들은 여인이 낭비를 했다고 말합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예루살렘 입성이 이어지고,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는 소식을 들으신 주님은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영광을 받을 때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곧 죽음의 때입니다.

•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그러나 죽음은 누구든 유희하듯 맞이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주님도 깊은 괴로움과 번민 속에서 조금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흔들림조차 없는 확신은 위험합니다. 오직 고사목만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한은 주님의 심정이 되어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버지, 이 시간을 벗어나게 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십시오.”(요 12:27-28) 괴로움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생각을 떨쳐버리듯 말합니다. “아니다. 나는 바로 이 일 때문에 이 때에 왔다.” ‘아니다’라는 이 말 속이 강력합니다. 독일어를 처음 배울 때 ‘아니다’라는 뜻의 ‘Nein’이라는 단어를 정말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 단어는 왠지 비장하고 단호한 느낌을 자아내곤 했던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 죽음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최악의 사태를 자기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 두려움의 위력은 줄어드는 법입니다.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의 <옥중서신>에는 마치 자기 운명을 예감한 듯 써내려간 시가 등장합니다. ‘자유에 이르는 길 위의 정거장들’은 ‘훈련’, ‘행동’, ‘고난’, ‘죽음’이라는 데 정거장을 노래합니다. 그 마지막인 ‘죽음’은 처연하지만 결연한 의지와 믿음이 돋보입니다.

“어서 오라,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길 위에 있는 최고의 향연이여,
죽음이여, 덧없는 육신의 성가신 사슬을 끊고,
눈먼 영혼의 벽을 허물어라,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던 것을 마침내 볼 수 있게.
자유여, 우리는 오랫동안 훈련하고 행동하고
고난을 겪으면서 그대를 찾아다녔노라.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얼굴에서 그대 자신을 보노라.”
(디트리히 본회퍼, <옥중서신―저항과 복종>,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354)

본회퍼는 죽음을 가리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길 위에 있는 최고의 향연’이라고도 말하고 ‘자유’라고도 말합니다.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그 자유를 하나님의 얼굴에서 본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연결된 사람이기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죽음을 맞아들임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통치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이 아니라 어둠에 속한 이들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다니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 “어둠이 너희를 이기지 못하게 하여라”라는 구절입니다. 자기가 누구에게 속한지를 알고,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사는 사람들이 빛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지레 겁을 먹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어스름이 내렸다 하여 지레 날개를 접지 말라. 빛이 없다면 스스로 빛이 되어서라도 갈 길을 가라. 외부의 빛이 가물거린다면 그 빛을 안으로 모시면 된다.”(김기석,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꽃자리, p.214)

• 저 깊은 은혜의 바다로
오늘 읽은 본문은 복음의 해설자인 요한의 음성이 도드라집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많은 표징을 그들 앞에 행하셨으나,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아니하였다”(요 12:37). 표징의 목격자가 되는 것과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징을 보지 않아도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표징을 보면서도 예수의 실상과 만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깨닫는 마음, 볼 눈, 들을 귀가 없기 때문입니다. 동맥경화처럼 그들의 생명의 흐름을 가로막아 믿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강고한 자아입니다. ‘자아’는 자기 중심성입니다. 나의 평안, 나의 안위, 나의 이익, 나의 욕망, 내 가족, 내 나라만을 세상의 중심으로 삼는 이들은 결코 예수님과 진실하게 만날 수 없습니다.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주님이 요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부인’입니다. 이걸 하지 못해 우리 인생이 누추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쇠사슬에 매인 채 살아갑니다. 표징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에는 흥미를 느끼지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이야기에 합류할 생각이 없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은 지도자 가운데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지만,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는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회당에서 쫓겨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안전에 대한 욕구 또는 소속에 대한 욕구가 예수를 통해 열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출교(黜敎)는 ‘물리칠 출’과 ‘가르침 교’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아포쉬나고고스(aposynagogos)입니다. 이 단어 속에 회당을 가리키는 ‘시나고그’가 들어 있습니다. 시나고그는 유대인들의 현실과 일상을 지배하는 명실상부한 마을의 중심입니다. 거기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철저히 외로워진다는 말이고, 취약해진다는 말입니다. 이미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은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넓고 큰 은혜가 저 큰 바다보다 깊다고 고백하는 찬송가 302장이 늘 떠오릅니다. 그 은혜를 체험하려면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마음 약하여 못 가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는 저 깊은 세계로 헤엄쳐 가기는커녕 얕은 물 가만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값싼 은혜에 마음이 팔린 것은 아닌지요? 앞서도 인용한 바 있는 디트리히 본회퍼는 값싼 은혜는 교회의 숙적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값싼 은혜는 어떤 것일까요?

“값싼 은혜란 투매投賣 상품인 은혜, 헐값에 팔리는 용서, 헐값에 팔리는 위로, 헐값에 팔리는 성찬, 교회의 무진장한 저장고에서 무분별한 손으로 거침없이 무한정 쏟아내는 은혜,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를 의미한다.”(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29)

값싼 은혜가 교회의 숙적이라는 말이 참으로 크게 다가옵니다. 찬송가 302장은 그래서 우리에게 권고합니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를 띄우고 주님의 은혜의 바다로 맘껏 저어가자고 말입니다.

• 빛의 자녀
두려움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요한이 한 말은 신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였다”(요 12:43). 사람의 영광이라는 말은 지도자라는 자부심 혹은 평판을 일컫는 말일 겁니다. 그들 가운데는 유대교의 최고 의결기구인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도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했다가 그 명예로운 지위를 잃게 되지나 않을까 저어하는 것입니다. 영광 혹은 명예는 그리스 로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고대에 벌어졌던 트로이 전쟁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장대한 서사시는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이라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여신’은 시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사건들에 대한 기억을 일깨워준다고 믿었던 시의 신 무사(Mousa)입니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 혹은 분노 이야기가 서사시를 이끌어가는 핵심입니다. 그는 왜 분노를 품었을까요?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지 어언 9년, 그리스 연합군 진영에 역병이 돌았습니다. 역병에는 늘 원인제공자가 있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호메로스는 그 자초지종을 이렇게 밝힙니다. 의술의 신 아폴론의 사제인 크뤼세스의 딸크뤼세이스가 그리스 연합군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에게 ‘명예의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명예의 선물’이란 한 사회가 어떤 사람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공하는 일종의 전리품입니다. 딸을 아끼고 사랑했던 크뤼세스가 딸을 돌려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아가멤논은 냉혹하게 거절했습니다. 한을 품은 아버지가 아폴론에게 복수를 청하자 아폴론은 그리스군 진영에 역병을 보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에게 크뤼세이스를 돌려주라고 권고합니다. 그는 마지못해 응했지만 자기 명예에 손상을 입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명예의 선물로 주어졌던 여인 브리세이스를 보상으로 데려가 버리고 맙니다. 화가 난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전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 이후 그리스군은 연전연패를 거듭합니다. 여러 사람이 그에게 전투에 참여해달라고 부탁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는 자기가 분노한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어떤 자가 나보다 더 권세가 있다고 해서 자기와 동등한 나를 약탈하고 명예의 선물을 도로 빼앗아 가려고 했기 때문이네.”(호메로스, <일리아스> 16권 52행,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출판부, p.347) 아킬레우스는 명예의 선물을 빼앗긴 것을 인간의 평등에 대한 침해로 보고 있습니다. 명예가 얼마나 소중히 여겨졌는지는 고대 올림픽 우승자에게 주어진 것이 금은보화가 아니라 월계관이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세계에도 헬레니즘 문화가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따라서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추구해야 할 가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인정 받는 삶,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자기 시대의 문화적 습속을 넘어서서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자아를 넘어 이웃에게 선물이 되는 삶이야말로 빛 가운데 걷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 속의 빛이 아주 꺼지기 전에 다시금 그 빛을 드러내고 또 활활 타오르게 해야 합니다. 몇 차례 말씀 드렸습니다만 초는 자기 몸을 태워 빛을 발하지만 사람은 고통 받는 이들을 향한 애태움을 통해 빛을 발합니다. 약자들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이들은 어둠에 속한 이들입니다. 주님께서 앞서 걸으신 수난의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우리 몸과 마음에 밴 어둠이 벗겨지고, 빛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4월 03일 10시 31분 3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