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6. 멈출 수 없는 생명의 노래
설교자 김기석
본문 요 20:19-23
설교일시 2022-04-17
오디오파일 s20220417-2.mp3 [51242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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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수 없는 생명의 노래
요 20:19-23
(2022/04/17, 부활절)

[그 날, 곧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닫아걸고 있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와서, 그들 가운데로 들어서셔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평화의 인사
아름다운 부활절 아침입니다. 부활의 환한 빛이 우리의 어둔 마음에도 깃들기를 빕니다. 여전히 어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분들, 절망의 심연에 빠져들고 있는 이들,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으면서 여전히 피울음을 삼키고 있는 이들, 전쟁의 참상을 겪으며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우크라이나 사람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주님이 체포되신 목요일부터 부활절 새벽에 이르기까지 결코 길지 않은 그 시간 동안 주님을 믿고 따르던 이들은 깊은 당혹감 속에서 지냈습니다. 무력감, 상실감, 두려움이 갈마들며 그들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했을 겁니다.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정신분열증을 앓는 여성 환자 한 사람은 사람들이 지옥을 왜 뜨겁고 불이 타오르는 곳으로 묘사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지옥은 사람들이 얼음덩이 속에 고립된 채 얼어붙어 있는 곳”(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김병화 옮김, 어크로스, p.45)이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들의 상태가 그러했을 겁니다.

예수님의 처형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고분고분한 이들에게는 관대했지만, 조금이라도 고개를 드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는 폭력을 가했습니다. 제국은 끝없는 자기 확장을 도모합니다. 십자가는 처형당하는 사람에게도 고통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속에 공포를 심는 장치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조롱을 당하셨고, 세상 사람들이 겪는 모든 고통을 몸소 다 맛보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고, 소외된 이들과 어울려 생명의 잔치를 벌이던 주님이 세상의 멸시와 천대를 한 몸에 받으셨던 것입니다. 성금요일 오후부터 부활절 새벽까지 무덤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은 어쩌면 주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둔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은 스스로 골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광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골방 바깥의 세상은 적대감이 넘치는 곳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이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 가운데로 들어오신 주님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일상적으로 건네는 인사말이지만, 깊은 상실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의 마음에는 아주 각별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상처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그 분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기뻐하였습니다. 상처는 주님을 인식하는 표와 같습니다. 평화와 기쁨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두 가지 선물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제국이 약속하는 평화와는 전혀 다릅니다. 로마의 평화는 힘과 폭력으로 내리누르는 반생명적인 평화이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사랑과 돌봄과 이해와 관용에서 비롯되는 참된 평화입니다. 로마의 평화는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고 주눅 들게 만드는 평화이지만, 주님의 평화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사하고 기쁨을 누리게 하는 평화입니다.

• 숨을 불어넣으심
주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평화를 빌어 주신 후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고 말씀하십니다. 이 파송의 말씀이 민망하기만 합니다. 제자들이 지금까지 보인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3년씩이나 주님과 동행했지만 그들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더불어 열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열광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옛 삶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누가 주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갈등했고, 위험이 다가오자 다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제자의 자격 시험이 있다면 그들은 실격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전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여전히 신뢰하신다는 신호를 보내신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데도 받아들여진다는 것, 바로 여기에 은총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런 후에 주님은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영은 살리는 영입니다. 주님과 만난 사람은 다 살아났습니다. 나사로만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갈릴리의 어부들도, 세리도, 병자들도, 귀신 들린 자들도,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이 났던 여인도 다 참 사람으로 살아났습니다. 주님은 봄바람처럼 다가가 사람들 속에 잠들어 있던 아름다운 가능성이 싹 트게 하셨습니다. 이런 광경을 떠올릴 때마다 김형영(1944 ~) 선생의 시 ‘봄봄봄’이 생각납니다. “다들 살아 있었구나./너도,/너도,/광대나물/너도,//그동안/어디 숨어서/죽은 듯/살아 있었느냐,//내일은/네오내오없이/봄볕에 나가/희고 붉은 꽃구름/한번 피워보자.” ‘다들 살아 있었구나’라는 구절 속에 담긴 안도감과 기쁨이 느껴지십니까? ‘너도’, ‘너도’라는 구절이 반복되면서 기쁨은 더욱 깊어집니다. 겨우내 땅 속에 묻혀 혹은 메마른 줄기에 갇혀 죽은 듯 보였지만 봄바람을 만나자 깨어난 생명들의 합창이 우렁찹니다.

주님의 영은 바로 그런 힘입니다. 제자들 속에 숨을 불어넣으신 주님은 그들이 해야 할 일도 일러주십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 죄가 용서될 것이요, 용서해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20:23)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첫 명령이 용서인 게 선뜻 납득되지 않습니다. 죄에 얽매인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전하라는 말일까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 곧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당국자들을 용서하라는 말일까요? 대상을 특정하지 않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자칫하면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정말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회개와 죄의 용서 그리고 성령을 통해 열리는 새로운 생명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그 본래의 자리로 파송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달리 이해해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용서를 뜻하는 헬라어 ‘아피에미 aphiemi’는 ‘떠나보내다’, ‘가게 하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어떤 일에 붙들리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받은 상처나 모욕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떠나보내지 못하면 그것은 두고두고 우리 삶을 괴롭힙니다. 주님은 당신을 부인하고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이 때 용서는 그들을 여전히 제자로 받아들이셨다는 말입니다. 그 용서가 제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감싸주셨습니다. 그러나 명백한 불의에 대한 용서는 사정이 다릅니다. 정의가 없는 용서는 악에게 힘을 더해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처벌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정의가 세워집니다. 처벌을 받고 돌이킨다면 믿음의 사람들은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가해와 피해의 도식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아픈 상처의 기억에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창조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 어둠 속에서 부르는 노래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숨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은 폭력과 통제를 통해 생명을 제압하려는 제국의 지배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뿐만 아니라, 세상 권력 앞에서도 당당하게 생명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해줍니다. 사도행전은 그렇게 주님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산헤드린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매를 맞고 위협을 당해도 그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드러냈습니다. 부활의 주님과 동행하는 이들은 힘겨운 가운데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망가진 세상을 치유하고 갈라진 세상을 이어주고, 고립된 사람들을 연결시킵니다. 이것이 생명의 춤입니다.

시편은 우리가 인생의 과정 중에 경험하는 희노애락애오욕의 모든 감정이 다 스며들어 있습니다. 탄식과 슬픔, 두려움과 기대, 믿음과 회의, 회한과 감사가 마구 얽혀 있습니다.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시이지만 시편 150편은 시편 전체의 결론입니다. 이 노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찬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이 없기에 찬양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기에 찬양해야 하고, 찬양해야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하늘 웅장한 창공에서 찬양하여라. 주님이 위대한 일을 하셨으니,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은 더없이 위대하시니, 주님을 찬양하여라.”(시 150:1-2)

부활절은 우리에게 생명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상에는 평화를 바라지 않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다른 이들을 희생시킴으로 자기들의 야욕을 채우려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위협에 흔들리지 않고 인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노자는 기자불립企者不立이요 과자불행跨者不行(도덕경 24장)이라 했습니다. 발꿈치를 들고는 오래 서 있을 수 없고, 가랭이를 크게 벌리고 걷는 자는 오래 걸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노자는 또 “모든 사물은 강장할수록 일찍 늙는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길답지 아니하다고 한다. 길답지 아니하면 일찍 끝나버릴 뿐”(物壯則老, 是謂不道. 不道早已, 도덕경 30장)이라고 말합니다. 부드럽고 연약한 것들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주님의 부활은 사랑이 증오를 이김을 보여줍니다. 지극한 어둠 때문에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하여 작은 등불 하나라도 밝혀 드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절망의 노래, 애상의 노래를 그치십시오. 기쁨과 감사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전쟁과 분열을 획책하는 이들에 맞서 끝끝내 평화를 추구하고, 인간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망가진 창조세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노래가 우리 운명이 됩니다. 부활의 빛이 우리 앞길을 비추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4월 17일 12시 26분 3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