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설교자 김기석
본문 롬 5:6-11
설교일시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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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롬 5:6-11
(2022/01/16, 주현절 후 제2주)

[우리가 아직 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제 때에,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더욱이 선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감히 죽을 사람은 드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더욱더 확실한 일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우리는 지금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된 것입니다.]

• 부어주신 사랑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하십니까?’라는 의례적 인사가 무색해지는 나날입니다. 지난 주중에는 평택 물류센터 공사 현장에서 잔불을 진압하고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하러 들어갔던 소방관 세 분이 크게 일어난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순직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금주 중에는 광주에서 신축 중이던 아파트 외벽 붕괴 사고로 여러 분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예기치 않은 일로 생을 마감한 그분들을 하나님께서 품에 안아주시기를 빕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범한 행복을 구하지만 그 소박한 꿈은 한 순간에 악몽으로 변하곤 합니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실로암에 있는 탑이 무너져서 치여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눅 13:4-5)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생명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지 않는 사회는 누군가를 희생자로 만들게 마련입니다. 공사 기한을 단축하기 위해 강행했던 겨울 공사가 참극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이들은 돈이라는 우상에게 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생명 존중의 기운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까닭은 그럴 수 있는 힘을 공급받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맛보고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들이 누리는 것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평화이고, 둘째는 은혜의 자리에 나아감이고, 셋째는 영광에 이르게 될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안에 산다 하여 세상의 모든 환난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 위험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더구나 악한 영이 지배하는 세상은 빛으로 살려는 이들을 곱게 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간결하게 보여줍니다. “악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행위가 드러날까 보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요 3:20). 악한 세상은 바르게 살려는 이들을 조롱하거나 박해하면서 그들을 길들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가없는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환난은 인내심을 낳고 인내심은 우리에게 단련된 인격을 이루어준다고 말합니다. 불과 물을 통과하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쇠처럼 불순물은 걸러지고, 어지간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인격의 중심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가 희망의 사람입니다. 희망의 사람은 자기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붙들고 살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도 절망의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 희망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caritas infusa)에 뿌리내리고 있기에 쉽게 스러지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부어주신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근거라고 말합니다.

• 사랑의 실증(實證)
사도 바울은 주님의 사랑이 무제약적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가 그것입니다. 표현은 셋이지만 내용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지 못할 때의 우리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고통스러운 자기 분열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한다(7:18)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경험하는 바입니다. 우리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따뜻한 이웃이 되고 싶고,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유머러스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기적이고, 경계심 많고, 비겁하고, 거칠고, 퉁명스럽고, 교만합니다. 서양 속담에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는 말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적나라한 상황입니다.

앗시리아의 왕 산헤립이 군사령관 랍사게를 보내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요구할 때 히스기야는 무력감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습니다. 군사력도, 전술도, 의지할 만한 외세도 없었습니다. 기세등등한 랍사게는 세상의 어떤 신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자기 땅을 구원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울분을 참을 수 없어 자기 옷을 찢고, 베옷을 두르고, 주님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왕은 대신들을 이사야에게 보내 자기 심정을 드러냅니다. “오늘은 환난과 징계와 굴욕의 날입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낳을 힘이 없는 산모와도 같습니다“(사 37:3).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우리도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먼저 자기를 부정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아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고 있습니다. 아기를 낳을 힘이 없는 산모가 바로 우리입니다.

이마누엘 칸트는 “비틀어진 나무로 만들 수 있는 직선은 없다. 이것이 인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도 인간성 속에 깃든 죄성을 깊이 통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세상에 중심에 놓고 말하고 행동하는 습성이 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 십자가 사랑이 우리에게 베풀어졌습니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우리 속에 있는 가능성이 발현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죄인조차 사랑으로 감싸 안는 하나님의 선행적 사랑 덕분입니다. 그 세 가지 때의 이야기는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연결됩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일찍이 시인 김달진은 십자가 사건의 역설적 신비를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이때처럼 인간의 잔학성을 보인 일은 아직 인류의 역사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이때처럼 인간의 깊은 사랑과 신뢰를 세상에 보인 일은 역사의 어느 곳에도 보이지 않으리라.“(김달진, <山居日記>, 세계사, p.98)

승려 출신의 시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십자가에서 숭고한 사랑과 참 사람의 길을 보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머리가 아니라 존재 전체로 경험하셨는지요? 그런 경험이 아직 없다 해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삶이라는 긴 과정 속에서 그런 때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시간
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랑이 ‘제때에’ 베풀어진다고 말합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카이로스’를 번역한 것입니다. 카이로스는 우리가 시계로 계측할 수 있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일상 속으로 파고드는 시간, 곧 ‘결정적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여러 차례 말씀하셨습니다. 삶을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도 카이로스적인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시간 경험을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이라는 시에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경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경험이 자기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날 이후 그는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순간이 베드로에게는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 빛 가운데서 임하신 주님으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하는 책망을 들었을 때가 바울에게는 카이로스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는 담장 밖에서 들려온 ‘톨레 레게‘(집어라 읽어라) 소리를 들었을 때가 카이로스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극적인 사건은 아니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를 확고하게 감싸고 있음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는 너무 이르지도 너무 더디지도 않게 다가옵니다. 조급증에 빠진 우리가 그 시간을 인내하지 못할 뿐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영혼의 자서전>과 <그리스도인 조르바>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그는 산길을 걷다가 올리브나무에 매달린 유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유충을 떼어 손바닥에 올려놓고는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투명한 꺼풀 속에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생명이 깨어나는 비밀의 과정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것 같았습니다. 그는 아직 고치 속에 갇혀 있는 미래의 나비가 햇빛으로 뚫고 나올 성스러운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보기 원했지만 그 깨어남의 시간은 너무 더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유충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순간 유충의 등이 찢어지더니 연둣빛 나비가 나왔습니다. 나비는 힘겹게 날개를 펴려고 애썼지만 날개는 겨우 반쯤 펴지다가 멈췄습니다. 조바심이 났지만 나비는 영영 날개를 펴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법칙을 어기고 서둘렀기에 나비를 죽이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아주 오래도록 카잔차키스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카잔차키스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인간은 서두르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작품은 불확실하고 불완전하지만, 신의 작품은 결점이 없고 확실하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영원한 법칙을 다시는 어기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나무처럼 나는 바람에 시달리고, 태양과 비를 맞으며 마음 놓고 기다릴지니. 오랫동안 기다리던 꽃과 열매의 시간이 오리라.”(니코스 카잔차키스, <영혼의 자서전2>, 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p.647)

하나님의 시간은 우리에게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때를 우두커니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앞서 걸으신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 한 가지 분명한 것
삶은 누구에게나 힘겹고 불확실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었기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옛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빌 3:14).

이것은 탈세계적인 태도를 권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위로부터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일상 속에 하늘의 뜻을 수행해야 합니다. 하늘의 길은 땅의 길과 이어져 있습니다. 땅에서 하늘을 살지 않는 사람은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땅에서 하늘을 산다는 말은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이 하나님이 머무시는 자리임을 의식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폭력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는 땅, 곧 내가 머물러 있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나 주가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함께 머물고 있다“(민 35:34).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은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습니다. 꿈에 그는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커다란 층계를 보았습니다.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나타나 그에게 보호와 동행과 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혼자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창 28:16) 여기서 ‘이 곳‘은 베델로 명명된 특정한 장소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우리가 사는 현장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노동의 현장, 놀이의 현장, 배움의 현장, 투쟁의 현장, 예배의 현장, 사귐의 자리 그 어디나 하나님 현존의 장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은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모신 이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사지로 몰아넣을 수는 없습니다. 뒷 배경이 되어줄 사람이 없다 하여 약한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설 땅을 잃어버린 채 세상을 떠돌고 있는 난민들을 얕잡아 보거나 비인간 취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척박한 땅에서 생명의 씨, 평화의 씨, 우정의 씨, 환대의 씨를 뿌리는 이들을 통해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누구나 십자가의 발치에 앉아 있는 이들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들의 새 가족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거룩한 소명에 응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 사랑에 참으로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이 거룩한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우리 모두를 감싸안아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1월 16일 12시 01분 2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