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9.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설교자 김형욱
본문 눅 10:25-37
설교일시 2021-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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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눅 10:25-37
(2021/12/05, 대림절 2주)

선하신 우리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제가 청파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지 2년이 다 되었는데요. 부임하던 바로 그 주부터 비대면 예배가 시작되어 마땅히 교우 여러분들께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빨리 시절이 좋아져서 함께 찬송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사역하게 될 날일 진심으로 기다립니다.

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소제목으로 일컫는 주님의 비유입니다. 복음서의 여러 이야기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본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되었습니다. 그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과 적대적으로 여겨졌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이를 구조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어찌보면 단순한 비유입니다.

그러나 비유가 단순하다고 해서 비유의 무게와 의미 또한 단순하고 가벼운 것은 아닙니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비유일수록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표면적으로 매우 윤리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윤리적 행위에는 그 안에 넘어서야 할 존재적 결단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상 한 번 해보시죠.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피 흘려 죽어가는 사람을 마주쳤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사람을 돕기 위해선 가던 길을 멈추는 결단이 필요하고, 혹 오해를 살 수 있음에도 주저하지 않고 응급한 치료를 시도하고자 하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갑을 여는 것까지 말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행동은 즉각적으로 비난을 불러 일으킵니다.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칭찬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그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비난하고, 사마리아 사람을 본받아야 한다라는 도덕적 결론으로 마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본문 속의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제사장, 레위사람,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내리지 않으십니다. 그저 세 사람의 행동을 보여주시고, 누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느냐고 물으실 뿐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악하거나 비겁한 사람,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은 선한 사람이라고 단순하게 비유를 끝내버리기 곤란한 지점들이 있습니다.

얼핏 단순해서 식상해 보이기까지 한 이 비유 말씀을 조금 더 깊게 들어가기 위해선 이 비유가 나오게 된 예수님과 율법학자의 질문과 대답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2
어느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며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눅10:25b)

예수님은 이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질문을 던지시며 말씀하시지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눅 10:26b) 라고 말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은 율법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질문은 하나가 아닙니다. 율법에 기록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 다음에 하나의 질문이 더 있습니다. 그것은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두 가지 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두 번째 질문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법에 대한 두 가지 결이 다른 질문을 다시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율법에 쓰여져 있는 내용은 무엇이냐는 것. 두 번째는 그 율법을 너는 어떻게 읽고 있느냐, 다시말해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느냐? 하고 묻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이 질문에 율법학자는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대답을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답합니다. 이 두 구절은 각각 신명기와 레위기에 쓰여 있는 말씀인데요.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정확한 답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을 받자마자 그는 율법에 기록된 것을 즉각적으로 떠올렸습니다. 나아가 하나님 사랑이라는 수직적 가치는 물론 이웃 사랑이라는 수평적 가치까지 적절하게 대답했으니 그의 대답은 그 자체로 만점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학자의 대답은 사실 완전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 그러니까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답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율법학자는 두 번째 질문이 있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율법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 거기서 뭘 더하고 덜할 것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겠지요. 어쩌면 율법에 쓰여있는 내용이면 되었지, 내 생각과 의견이 뭐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님 말씀처럼 어떻게 있는데 무엇이 중요한가? 라고 여겼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의 대답을 가만히 들으시고 "네 대답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말해 영생을 얻기 위한 율법의 가르침을 네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두 번째 질문, 그 율법 조문을 네가 어떻게 알고있고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지 물으셨던 두 번째 질문엔 답을 듣지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선하신 주님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알려 주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대로 행하라" 라고 하십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라"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서 이 두 문장은 서로 붙어 있으나 그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고 말씀인지 우리는 정답을 이미 그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그러한 말씀이 어디에 쓰여 있는지 우리는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은 잘 알고 있지만,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당부 앞에 멈칫합니다. 적절히 행하라 또는 요령껏 행하라가 아니라, "그대로 행하라" 입니다.

'네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대로 행하라' 라는 주님의 명령은 그 자체로 매우 부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하신 그 다음 문장을 듣게되면 그 부담이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주님은 그대로 행할 것을 말씀하시고 곧바로 "그리하면 살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것도 어려운데, 그렇게 해야 산다고 하니 이게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엔 어떤 합리적인 것이 없는 것 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시고 계십니까? 그저 상징적인 표현일까요? 혹은 문학적인 과장일까요?

이 말씀을 들은 율법학자는 주님의 이 가르침을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다소 난데없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합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것이다" 라는 말씀을 받은 이의 다음 대답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니 무언가 많이 어긋나 있습니다.

그가 말씀을 그대로 행하라는 명령 앞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엉뚱한 대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율법학자의 오만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율법학자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율법에 기록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대로 행하라는 주문에 대해 내가 사랑할만한 이웃이나 골라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는 하나님 사랑에는 문제가 없으니 내 이웃될 사람들이나 결정해주면 내가 성심껏 섬기겠다는 뜻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말해 율법학자는 그대로 행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 입니다.

여기까지 들으신 주님은 비로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유의 말씀을 전하십니다.

3
이 비유의 내용은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에 강도를 만나 옷이 벗겨지고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곁을 지나갔으나 모른척했고, 이어 레위 사람도 곁을 지나갔으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왜 이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쳤는지는 여러 가설들이 있습니다. 피 흘리는 사람을 만져서는 안 된다는 율법 조항에 얽매여 그랬다는 주장. 또 다른 어떤 학자는 이 주장을 반박하며 피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서둘러 묻어 주는 것이 더 율법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유대인과 대척점에 있는 사마리아인을 등장시켜 허례허식에 찌든 종교지도자들에게 수치를 주기 위함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모두 타당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주님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내리지 않습니다. 물론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사람에겐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이들에 대한 윤리적 평가 또는 신학적 평가를 내리기 쉽지 않은 지점들 또한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는 없었으나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있었던 것, 혹은 달랐던 것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33절에서 누가복음의 기자는 우리에게 힌트를 하나 알려줍니다. 그것은 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자마자 들었던 '감정'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 사람을 보자마자 '측은히' 여깁니다. 33절 하반부에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는 단어와 표현은 같은 누가복음 안에서 먼저 7장 13절에 등장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인성의 죽은 자신의 아들 옆에 슬피 울던 한 과부를 보시며 하신 말씀 속에 등장합니다. 7장 13절,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의 가엾게 여기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5장에서도 측은히 여기다라는 표현이 동일하게 등장하는데요. 우리가 역시 잘 알고 있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다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보며 달려 나온 아버지를 묘사할 때 마찬가지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는 일어나서,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먼 거리에 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서,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눅 15:20)

그러니까 누가복음에서 '측은히 여기다'라는 표현은 실의와 절망에 빠진 인간에 대한 애끓는 감정같은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없었던 이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어 34절과 35절에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가까이 가서,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맸습니다. 그리고 짐승에 태워 여관으로 갔습니다. 비용을 지불하고 추가로 더 지불할 용의가 있음을 여관 주인에게 밝힙니다. 비유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고 주님은 다시 한 번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눅 10:36b)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앞서 29절에서 율법학자의 질문과 쌍을 이룹니다. 율법학자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들어보시지요. 율법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눅 10:29b)

'누가 내 이웃인가?'와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는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전자의 질문, 다시 말해 율법학자의 의도는 나의 이웃의 범위를 한정 짓겠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내 이웃이 될 만한 사람을 가려서 섬기겠다는 것이지요. 후자는 다릅니다. 내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웃이 되어주는 것, 그런데 그 이웃의 범위를 한정하지 않는 것, 그가 위기에 처해있거나 나와 입장을 달리하거나 나와 이런저런 지향이 다르다 할지라도 내가 그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준다는 주님의 말씀은 다른 의미로 그리스도인의 이웃 섬김에는 범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 주님의 비유를 들은 율법학자의 마음에도 어떤 울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이웃이 되어 주었냐는 주님의 질문에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답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을 지나쳤다면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르러 주님은 다시 한 번 반복하여 당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눅 10:37b)

다시 등장한 표현이지요. '네 대답이 옳다 /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옳다' 그러니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와 괘를 같이 합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기 위한 율법의 가르침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알고 그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라는 믿음 또한 마치 숨겨진 명제처럼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자주 생각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거 중요하지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라는 생각이 진리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주님도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모르시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비유로 말씀해주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을' 그대로 행하는 것 어렵다. 나도 안다. 그런데 그거 그렇게 어려운 일 아닐 수 있다. 이 사마리아 사람처럼 위기에 처한 사람을 '측은히 여겨라' 그리고 그를 도와주어라. 다른게 아니라 이것이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청파교회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으면 그것을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문학적인 은유도 아니고, 상황과 여건을 살펴가며 적절히 조절해야하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 또한 율법학자처럼 이웃을 골라가며 섬기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는 물론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사랑의 방법을 친절히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다면 측은히 여기고,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가서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라도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더불어 성서의 커다란 기둥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웃을 고르려하고 사랑의 정도 또한 적절히 조절하려 합니다. 머뭇거리는 우리의 신앙 앞에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살짝 비틀어 읽기를 하며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모든 비유는 우리 자신과 우리 상황을 그 비유 속에 잇대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비유 속에서 우리 자신을 길을 가는 사람으로 그리고 누군가가 죽어서 쓰러져 있는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래서 내가 만약 이런 위기에 처한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할지 고민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길 가던 사람이 아니라 강도 만나 죽게된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누군가의 즉각적인 도움이 없다면 곧 죽을 사람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이웃을 살리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를 살리는 일일 수 있습니다. 사랑과 섬김은 죽음의 원리가 작동하는 엄혹한 지금의 현실에서 사람들을 살리는 하나님 나라를 구현한 가장 중요한 원리일 것이다.

대림절기 기간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등 록 날 짜 2021년 12월 05일 10시 35분 06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