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골 1:21-23
설교일시 202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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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라
골 1:21-23
(2023/03/05, 사순절 제2주)

[전에 여러분은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분의 육신의 몸으로 여러분과 화해하셔서,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믿음에 튼튼히 터를 잡아 굳건히 서 있어야 하며, 여러분이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복음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었으며,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 믿음의 성장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내일이면 벌써 경칩입니다. 산책길에 바닥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곳곳마다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에 기뻐하다가도 아프리카 난민들이 지중해의 푸른 바다에서 수장되고 있다는 보도나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소식을 접하는 순간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홀대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은 경청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은 선과 악이 뒤섞여 있다지만 날이 갈수록 악이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어둠, 상실, 두려움, 좌절감을 느끼는 이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무정한 사람들 그리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지친 시편 시인의 고백이 마치 지금 우리의 고백인 것처럼 처절합니다. “내 마음은 진통하듯 뒤틀려 찢기고, 죽음의 공포가 나를 엄습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이 나에게 밀려오고, 몸서리치는 전율이 나를 덮습니다”(시 55:5-6). 시인은 비둘기처럼 자기에게 날개가 있다면 멀리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물고 싶다고 말합니다. 폭력과 분쟁, 죄악과 고통, 억압과 속임수가 떠나지 않는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우리들의 삶의 자리입니다. 이 꼴 저 꼴 안 보고 살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역사의 한복판으로 부르시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아무런 걱정도 없는 낙원으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쟁터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손에 쥐어진 무기는 사랑, 섬김, 나눔, 돌봄, 이해, 용서, 가난함 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무기를 가지고 세상의 어둠을 극복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걷는 골로새 교인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주시기를 빕니다”(골 1:9)라고 축복합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은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에 단단히 결합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과의 일치 혹은 깊은 사귐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주님께 합당한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어긋나는 일을 서슴없이 행한다면 그의 고백은 허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이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일을 통해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선한 일입니다. 선한 일을 행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점점 더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더욱 강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분들을 보면 참 밝고 긍정적입니다. 자기들의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 우리가 믿는 분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은 소속이 바뀐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 1:13). ‘암흑의 권세’는 사탄이 지배하는 영역, 달리 말하자면 이기적인 욕망의 인력에 속절없이 이끌리는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로잡힌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들을 위해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무엇이든 수단으로 대하고 함부로 사용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죄의 중력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 곧 그리스도의 은총의 자장 안으로 들어갑니다. 거기 속한 이들은 자기 좋을 대로 살지 않습니다. 자기를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합니다.

패션디자이너 장명숙 선생(*밀라논나로 많이 알려짐)의 인터뷰를 보다가 살짝 놀랐습니다. 70대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과 아주 친밀하게 소통하는 그는 자기 몸을 아주 많이 아낀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유가 특별합니다. 그는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다고 하면 의사한테 물어서 약 먹는 대신 한 시간 걷고, 비타민D가 부족하다면 햇빛을 충분히 쬔다고 합니다. 자기 몸에 케미컬 그러니까 화학 성분으로 만든 약을 넣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까지 절제하는 이유가 뭐냐는 물음에 그는 “내 몸이 아니잖아요. 죽으면 드려야 하니까.”라고 대답합니다(김지수 인터뷰집, <위대한 대화>, 생각의 힘, p.127-8). 그는 시신을 기증하기로 서약을 했습니다. 그러니 자기 몸을 잘 돌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마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라는 말은 조금 말랑말랑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혁명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가리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믿는 우리에게 이 고백은 그렇게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서신의 삶의 자리를 살펴보면 이 말 속에 담긴 혁명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로 로마는 황제를 가리켜 ‘신의 아들’이라고 칭했고, 그렇기에 황제는 눈에 보이는 신으로 숭상되었습니다. 바울은 황제에게 귀속되던 용어를 예수님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백이 실로 장엄합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왕권이나 주권이나 권력이나 권세나 할 것 없이,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 1:16)

반체제적 고백인 동시에 우리를 큰 세계 앞으로 인도하는 문장입니다. 날마다 끝없이 밀려오는 일들을 처리하느라 우리 영혼은 아주 작아졌습니다. 하늘을 바라볼 여유조차 없이 삽니다. 우리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지를 잊고 삽니다. 큰 세계와의 접속이 끊어질 때 삶은 왜소해집니다. 가끔은 일상을 떠나 크고 장엄한 세계와 마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릴리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치유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던 예수님을 우주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분 안에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진위를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장대한 고백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늠해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삶이야말로 온 세계를 관통하는 생명의 원리라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생명을 온전하고 풍성하게 하는 데 집중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샬롬입니다.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주눅들게 하고, 파괴하는 것은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 어떤 제도, 어떤 국가가 그런 기본 원리를 위반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 우리 현실과 신앙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가 어느 순간 소비자로 전락했습니다. 더 많이 누리고, 더 편리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거짓 신화가 우리를 확고히 붙들고 있습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소유해야 한다는 달콤한 속삭임이 쉴 새 없이 우리 귓전에 들려옵니다.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은 누리지 못하고 아직 손에 들어오지 않은 것을 쫓느라 숨이 가쁩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욕심에 사로잡혀서 헤매는 것보다 낫다”(전 6:9)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소유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파괴적인지를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사 5:8).

소유 중심적인 삶의 궤도에 들어설 때 우리는 감사를 잊고, 이웃을 잃게 됩니다. 다른 이들의 몫까지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려 하지만, 실상 그들은 재앙을 심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는 삶의 어리석음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호 8:7). 믿음의 사람들은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봄을 누리고, 햇볕을 누리고, 강물 소리를 누리고, 새소리를 누리고, 구름을 누리고, 그늘을 누리고, 우정의 맛을 누리고,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는 맛을 누립니다. 누릴 줄 알아야 소비 사회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끔 시인 김완하 님의 ‘엄마’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첫돌 지난 아들 말문 트일 때/입만 떼면 엄마, 엄마/아빠 보고 엄마, 길 보고도 엄마/산 보고 엄마, 들 보고 엄마//길 옆에 선 소나무 보고 엄마/그 나무 사이 스치는 바람결에도/엄마, 엄마/바위에 올라앉아 엄마/길 옆으로 흐르는 도랑물 보고도 엄마/(중략)/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찌 사람뿐이랴//저 너른 들판, 산 그리고 나무/패랭이풀, 돌, 모두가 아이를 키운다”. 천지만물을 ‘엄마’로 호명하는 저 아기야말로 하늘이 보낸 천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마음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암흑의 권세’에서 벗어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 둘을 ‘제국’과 ‘이스라엘’의 차이로 설명합니다.

“제국은 생산과 소비의 관리에 미친 듯이 사로잡혀 있지만, 이스라엘은 안식일 준수를 통해 그 삶이 선물임을 인식하도록 부름받는다. 제국은 노예의 고통과 억압의 경제에 의해 지탱되는 데 반해, 안식일을 지키는 이스라엘은 가난한 자와 낯선 자, 나그네와 고아, 과부를 돌봄으로써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지탱된다.”(브라이언 왈쉬·실비아 키이즈마트, <제국과 천국>, 홍병룡 옮김, Ivp, p.109)

믿는다는 것은 삶을 선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힘겨워도 꿋꿋하게 버티며 살아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또한 사회적 약자들을 기쁨으로 돌보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 변화된 삶
오늘 본문인 골로새서 1장 21절부터 23절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더욱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우리는 악한 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없는 은총 덕분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으로 자기 앞에 세우셨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우리 삶의 실상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삶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갈등과 분열이 극심합니다. 전쟁과 참상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나라를 끝내 포기할 수 없습니다. 믿음에 굳건히 서서, 복음의 소망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혐오가 짙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지금처럼 종교가 소중한 시대가 없습니다. 종교는 더 큰 세계의 빛 가운데서 우리 삶을 비춰보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코스모스>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책에서 매우 흥미로운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외계인들이 저 먼 우주로부터 날아와서 지구라는 행성에 생명체가 있는지를 살피는 광경을 상상해보십시오. 아주 먼 데서 바라볼 때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합니다. 아주 가까이 다가온다 해도 지구는 대기와 푸른 바다와 대지로 구성된 행성일 뿐 인공의 흔적은 보이지 않을 겁니다. 더 가까이 다가와서 지구의 궤도를 돌면서 우주인들은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는 동시에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구선회 궤도를 돌면서 외계인 탐험가는 무언가 확실히 잘못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슨 생물이건 간에 지금 지구를 우점한 생물들은 지구 표면을 개발하는 데 그렇게도 많은 공을 들였건만, 그와 동시에 그들의 오존층과 산림을 파괴하고 표토를 흘려버리고 있으며 그들 행성의 기후에 통제하지 못할 묵직한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는가? 그들은 그들의 숙명을 잊고 있는 것일까? 그들 모두를 존속시켜 줄 환경을 위해 협력할 수는 없단 말인가?”(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현정준 옮김, 사이언스 북스, p.97)

칼 세이건은 외계인 탐험가가 그쯤에서 지구에 지성이 있는 생물이 있다는 추측이 잘못인지 모른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 밖에 없는 우리 고향을 함부로 훼손하고 있습니다. 기후 위기, 핵 전쟁의 위협, 빈부 격차, 체제 경쟁으로 망가진 세상을 고치는 것, 사람들을 갈라놓는 장벽을 허물고 다리를 놓는 것, 총과 칼을 녹여 쟁기와 보습으로 만드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시급한 소명입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고, 그 일을 하시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꿈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복음의 소망을 버리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끄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3년 03월 05일 12시 03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