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8. 하나님과 맞서지 말라
설교자 김기석
본문 암 2:6-16
설교일시 2017/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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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맞서지 말라
암2:6-16
(2017/07/09, 성령 강림 후 제5주)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아모리 사람들을 멸하였다. 아모리 사람들이 비록 백향목처럼 키가 크고 상수리나무처럼 강하였지만, 내가 위로는 그 열매를 없애고 아래로는 그 뿌리를 잘라 버렸다. 내가 바로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인도하여 아모리 사람의 땅을 차지하게 하였다. 또 너희의 자손 가운데서 예언자가 나오게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 가운데서 나실 사람이 나오게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아, 사실이 그러하지 않으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실 사람에게 포도주를 먹이고, 예언자에게는 예언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곡식단을 가득히 실은 수레가 짐에 짓눌려 가듯이, 내가 너희를 짓누르겠다. 아무리 잘 달리는 자도 달아날 수 없고 강한 자도 힘을 쓰지 못하고, 용사도 제 목숨을 건질 수 없을 것이다. 활을 가진 자도 버틸 수 없고, 발이 빠른 자도 피할 수 없고, 말을 탄 자도 제 목숨을 건질 수 없을 것이다. 용사 가운데서 가장 용감한 자도, 그날에는 벌거벗고 도망갈 것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 유한한 인생의 회한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주일을 맞은 제 마음이 조금 무겁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21년 2개월 동안 전도사로 일하시고, 2004년에 은퇴하셨던 박옥식 전도사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벽에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전도사님과 부목사로 7년, 담임목사로 7년을 함께 했습니다. 제 목회 인생에서 만난 가장 소중한 인연 가운데 한분이십니다. 전도사님은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는 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교회와 교인들을 섬기던 분입니다. 마음의 한 구석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겸허하게 엎드려 삶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다는 것이 때로는 무겁고 힘들지만, 다른 한편 참 엄숙하고 거룩한 과제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살다가 예기치 않은 시간에 세상을 떠나갑니다. 인간의 생명은 바람이 불고 햇빛이 쪼이면 스러지고 마는 안개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그 위에 입김을 부시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그렇다. 이 백성은 풀에 지나지 않는다"(사40:7). 이사야의 말입니다. 어느 히브리 시인은 우리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시90:10)이라고 말합니다. 씁쓸한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허망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한한 인생이지만 인간은 무한을 바라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의 말대로 인간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지만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생각'에 있습니다. 유한한 우리가 무한한 하나님을 바라보고, 뜻을 여쭙고, 그 뜻에 따라 자기 생을 조율한다는 사실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잠시 그분의 일을 하다가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주님의 뜻을 여쭤가며 성심껏 살다가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이 완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끔 생각나는 찬양이 있습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하늘 문 향해 말하리/예수 인도하셨네/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셨네/나의 무거운 죄 짐 모두 벗고 하는 말/예수 인도하셨네."

• 탐욕의 시대
우리는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요8:14) 하신 분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가끔 발걸음이 꼬이고, 길을 잃기 일쑤이지만, 예수야말로 우리 삶의 길이십니다. 그 길을 앞서 예비한 이들이 바로 예언자들입니다. 아모스를 통해 주신 말씀 앞에서 겸허하게 우리 생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아모스는 히브리어로 '들어 올리다', '나르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야훼께서 나르신다'는 뜻의 '아마시야'의 축약형으로 보입니다. 그는 원래 베들레헴에서 멀지 않은 농촌마을 드고아에 살던 부유한 목축업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임금 여로보암 2세(주전 787-747)와 남왕국 유다의 웃시야(주전 781-740)가 다스리던 때, 대략 주전 8세기의 중엽 쯤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호세아보다 10년 쯤 앞서 활동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상대적인 안정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오랫 동안 이스라엘을 압박하던 시리아는 동쪽에서 발흥한 앗시리아 제국의 팽창 정책으로 인해 급격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고, 앗시리아의 세력은 아직 이스라엘까지 위협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 틈을 타서 남북 왕국은 요단강 동편의 옛 고토를 회복하기에 이르렀고,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입니다. 민족적인 자긍심과 자신감이 높아진 건 좋았지만, 사회적 불균형은 더욱 심화되었던 것입니다. 부자들은 점점 부자가 되어가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습니다. 국가에 유입되는 부가 사회 밑바닥 계층 사람들에게까지 이전되지 않았습니다. 이건 우리도 경험한 바입니다. 발전론자들은 분배 정의를 회복하는 일보다 파이를 키우는 게 먼저라느니, '낙수 효과'(trickle-down effect)를 말하면서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뿌리치곤 했습니다. 그들은 고소득층의 소득 증대가 소비 및 투자 확대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저소득층의 소득도 증가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이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이론입니다.

아모스는 자기 시대를 하늘의 눈으로 꿰뚫어보았습니다. 사마리아는 사치가 만연했고, 졸부들의 향연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토라의 핵심 원리인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관심'은 실종되었고, 힘이 정의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정의의 보루였던 법정도 타락해서 늘 강자의 편을 들곤 했습니다. 그런 세상을 준엄하게 꾸짖어야 할 종교 역시 타락했습니다. 종교적 행위는 번성했지만, 그 속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담기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의 배에 기름기가 돌면서 그들의 시선은 부자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총체적 난국입니다. 남왕국 출신의 아모스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베델 신전에 올라가서 예배드리러 오는 이들을 책망합니다. 아침마다 희생제물을 바치고, 사흘마다 십일조를 바치고 누룩 넣은 빵을 감사제물로 불살라 바치고, 자원예물을 바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겠느냐, 그것은 결국 자기들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암4:4-5).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로 돌아감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기를 바라며 우리의 상한 마음을 주님께 바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나 풍요로움에 중독된 사람들은 물질은 바치지만 마음은 바칠 생각이 없었습니다. 물론 삶의 방식도 바꿀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모스는 바로 그런 현실을 꾸짖습니다.

• 용서받을 수 없는 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서너 가지 죄라는 표현은 아모스의 예언에서 특징적인 어구입니다. 잠언에도 유사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주변 나라가 저지른 죄에 대한 심판을 예고할 때도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너 가지라는 표현은 악의 정도가 가득 차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입니까? 크게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됩니다. 이스라엘의 특권층들은 빚을 빌미로 무죄한 사람들을 종으로 팔아버렸고,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짓밟음으로 가난한 이들의 살길을 막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야훼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가 마련되지 않으면 세상은 욕망의 전쟁터가 되고 맙니다. 욕망으로 인해 흐려진 눈에는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이웃들의 아픔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다른 이들은 다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인간에 대한 소외가 이렇게 일어납니다.

저는 며칠 전에 나온 JTBC 앵커브리핑을 통해 '갑질'(gapjil)이라는 단어가 영국 인디펜던스지에 소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로 번역할 적절한 말이 없었기에 그들은 갑질을 소리나는 대로 알파벳으로 표기하고, 그 단어 속에 내포된 의미를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갑질이란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이 약자에게 하는 부당한 행위를 일컫는 말입니다. 또 다른 단어 하나가 소개되었는데 그것은 개저씨(gaejeossi)였습니다. 딱 봐도 '개'와 '아저씨'의 합성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단어가 매우 심란한 단어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초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성 차별, 성 추행을 저지르고도 잘못을 인정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피해자를 탓하는 사람들, 혹은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주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무개념 중년 남성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런 단어의 유행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천박하게 변해가고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징표입니다.

피자와 통닭 프랜차이즈 업체 CEO들의 갑질 행위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 가족들에게 이권을 몰아주거나, 값비싼 식재료를 구매하도록 강요함으로 이익을 극대화했다고 합니다. 말을 잘 듣지 않는 이들을 폭력적 방식으로 몰아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하루 평균 프랜차이즈 업체 36개가 문을 닫는다고 합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나 연민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어려운 영어 단어이지만 요즘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 그것입니다. 개발이 늦어진 지역에 상권이 형성되면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곳에서 애써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소상공인들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의 살풍경한 모습입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아모스의 시대에도 이런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회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다른 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종교 행위와 관련됩니다. 아모스는 아비와 아들이 같은 처녀에게 드나들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향락 문화가 빚어낸 파렴치한 일탈 행위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경제적인 예속 상태에 처한 사람들을 강자들이 성적으로 착취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이건 정말 악마적입니다. 둘째는 가나안 토착 종교인 바알신앙과 관련된 것입니다. 바알 신전에는 신전 창녀들이 있었고 종교행위는 늘 성적인 일탈과 결합되곤 했습니다. 어느 경우이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이들을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순간, 인간의 존엄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영광 또한 가려집니다.

• 생의 한 가운데에서
왜 이런 참담한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자기 도취에 빠져 하나님을 마음에서 제거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삶이 곤고할 때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 앞에 엎드립니다. 하지만 그러한 어려움이 소멸되는 순간, 잠시 모습을 감췄던 자아가 드러나고,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곤경에 처했을 때 믿음을 유지하는 일이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바라볼 곳이 그곳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삶이 두루 평안할 때입니다. 굳이 구하지 않아도 먹을 것이 있고, 누리고 싶은 것을 다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습관처럼 하나님을 망각하곤 합니다. 역사의 변혁을 바라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기억 투쟁인 것처럼, 믿음 가운데 살려는 이들도 기억 투쟁이 필요합니다.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기 전 마치 유언처럼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이 대목이 특히 크게 다가옵니다.

"이스라엘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 먹거리가 넉넉해지고,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겼다."(신32:15)

생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뼛속 깊은 곳에 새겨져야 합니다. 욕망의 중력이 우리를 땅으로 잡아 끌 때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으려면, 위의 것을 향한 우리 마음의 열망을 늘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아모리 사람들을 몰아내셔서 가나안에 살게 하신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그들은 삶이 평안해졌을 때 예언자들을 침묵시켰고, 정결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나실인들을 타락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자기들의 더러움을 상기시키는 이들을 허용하기 싫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유한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아무리 몸이 날래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힘 깨나 쓰는 용사라 해도 심판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 날이 닥쳐올 때에야 그들은 자기들이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할 것입니다.

생의 한 가운데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사람, 우리가 머물고 있는 일상적인 삶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머무시는 땅임을 자각하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탐심에 이끌려 이웃들을 타자화하고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들은 하나님과 맞서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강자처럼 보이지만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잠17:5)입니다. 이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다른 한 명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적 행위는 내 안에 있는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걸 뒤집어 보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사람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썩어질 것을 좇던 지난 날의 삶에서 벗어나와 영원한 것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주님은 참 사람의 길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비록 더디더라도 그 길을 향해 한 걸음씩 꾸준히 나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7년 07월 09일 11시 29분 38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