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4. 하나님의 형상
설교자 이재훈
본문 고전 15:45-49
설교일시 2022-08-21
오디오파일 s20220821-2.mp3 [35480 KBytes]
목록

하나님의 형상
고전 15:45-49
(2022/08/21, 성령강림 후 제 11주)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신령한 것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과 같이, 흙으로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하고,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흙으로 빚은 그 사람의 형상을 우리가 입은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 입체적으로 창조된 인간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길 빕니다. 절기상으로 입추(立秋)가 지나더니,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외면하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오늘 아침,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까? 좋은 컨디션으로 기분 좋은 하루를 맞으셨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힘들고 무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셨습니까?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자주 시간의 소중함을 잊는 게 사람의 오랜 버릇인 것 같습니다. 사실 매일 우리가 느끼는 감정, 생각은 늘 같을 수 없고 또 같을 필요도 없습니다. 삶이란 늘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페르시아 시인 루미(Rumi)의 대표적인 시가 있습니다.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여인숙(The Guest House)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보면, 서두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루미는 인간은 여인숙과 같아서, 매일 아침 다양한 생각과 감정들을 맞이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루미는 이러한 각각의 손님들을 존중하며, 모든 것을 환영하고 맞아들이라고 요청합니다. 왜냐면, 이 모든 것은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누군가 저 멀리서 보낸 안내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일생이라는 게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참 많이 닮아있는 게 사실입니다. 내게 일어난 일 때문에 기뻐하거나 슬퍼하기도 하고 또 반복되는 일상 때문에 지루해하기도 하는 게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별것 아닌 일로 변덕을 부리는 자신을 보며 흔들림 없는 한결같은 사람이 되길 꿈꿉니다. 한결같고, 올곧은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렇게 올곧게 살아가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면 인간의 내면은 마치 미로처럼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되기를 평면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입체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계처럼 만들지 않았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입체적인 분이신데,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는 당연히 그분과 닮아 있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모습을 다 드러내진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결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크고 작은 경험을 통해, 그분의 형상을 조금 맛볼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잠깐의 시간을 통해 감춰져 있는 하나님과 그분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모습을 조금 살펴보려고 합니다.

• 고린도전서: 하늘에 속한 형상

오늘 함께 살펴볼 말씀은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몇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파벌이 형성되었음을 알게 되는데, 이 문제로 인해 바울은 고민에 빠집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이유로 문제가 발생했느냐 인데, 그 이유는 고린도 지역에 왜곡된 진리를 전하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광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데, 이 열광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이미 완성된 그리스도인으로 보았고(4:9-10) 또 거짓된 진리로 고린도 교인들을 현혹시켰던 것입니다.

이 열광주의자들은 특히 성령의 은사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통해 황홀경에 빠지게 되고, 그 황홀경의 경험으로 자신들이 천상의 세계로 옮겨진다고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열광주의자들은 미래에 성취될 부활, 즉 죽음 이후의 부활을 의미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땅의 삶은 외면한 채, 미래의 부활만을 강조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후 세계만을 강조해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이웃의 소중함을 잊고 사는 이들을 우리는 마땅히 경계합니다. 그러나 이 열광주의자들이 말하는 소위 미래의 부활에 대한 부정은 이 땅에서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겨서 나온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미래의 부활도 현실의 삶도 모두 외면한 자들이었습니다.

열광주의자들은 성령의 은사만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그들에게 현실의 삶과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한 가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 현실에서의 삶이 오히려 자신들을 더 불결하게 만든다고까지 말하기도 했습니다(7:1-5).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긴 자들의 편협한 견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열광주의자들은 특히 성령의 은사 가운데, 방언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방언을 곧 성령께서 내 주하시는 가장 중요한 내적 증거로 삼았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성령의 은사는 특정 소수만을 위한 선물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총은 누구도 특권화할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열광주의자들은 더 깊은 지혜와 넓은 지식을 얻으려고 애썼는데, 그 이유 또한 자신의 몸을 부풀리기 위함이었습니다.

• 자연적인 것과 신령한 것

이처럼 고린도교회는 거짓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인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 몸의 부활을 부정하는 교인들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열광주의자들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12-14)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가 주님의 살아나심에 있는데, 그것을 부정하면 우리의 말과 행동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말합니다. 결국 바울은 십자가를 통한 부활, 즉 죽음을 통해 다시 생명을 얻는 자기 부정의 경험이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가다가, 말미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는 마치 부활에도 단계가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성경에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고 기록한 바와 같이,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신령한 것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므로 흙으로 되어 있지만,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났습니다.”(45-47) 여기서 ‘산 영’ 즉, ‘살아 있는 영’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첫 번째 아담을 말합니다. 그리고 ‘생명을 주는 영’은 두 번째 아담인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은 성경에 기록되기를, 흙으로 지어진 최초의 인간으로, 지금 우리는 아담의 후예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아담은 예수를 칭하는데, 우리가 이 두 번째 아담인 예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우리가 첫 번째 아담은 건너뛴 채, 두 번째 아담으로 곧장 건너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바울은 46절에서 신령한 존재인 예수가 먼저가 아니라 자연적인 존재인 아담이 먼저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가 아담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육신을 입은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말인 것입니다. 바울은 육신을 부정하는 열광주의자들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우리가 흙에서 온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종 목적지는 분명하지만, 곧장 그곳으로 가려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열광주의자들은 지름길을 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연적인 것은 외면한 채, 신령한 것만을 추구했던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이 빠지는 오류

말씀 준비를 하다 보니, 문득 예전에 있었던 일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몇 사람과 책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이야기의 내용은 사람이 종종 빠지게 되는 어떤 함정 혹은 오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뭔가 독립적이고 위대한 정신을 소유해야만,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가 깨닫게 된 것은, 뭔가 거룩하고 성스럽게 되려는 사람들이 어떤 절차나 과정 없이 높은 정신을 소유하려다 보니 늘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몸의 기본적인 욕구나 내 안의 결핍은 돌보지 못한 채, 거룩하고 고귀한 정신을 추구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가를 그날의 이야기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그랬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맴돌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몸의 요구를 우선시한다는 게 많은 것을 누리고 소유하고 충족시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돌봄 없이, 거룩한 반열에 오르기란 매우 어려운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요구는 외면한 채, 어떤 거룩한 사명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원하는 평화는 이루지 못한 채, 어쩌면 원치 않는 분열만을 조장하게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결핍 혹은 고통이 성숙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뭔가를 철저히 비워내는 과정 중에 깊은 깨달음을 얻기도 합니다. 예수께서도 그러하셨고 또 실제로 결핍을 자양분 삼아서 위대한 정신을 얻게 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신령한 것만을 추구하느라 자신을 살피는 일과 또 평범한 일상의 관계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이지, 단번에 건너뛸 수 있는 그런 목표점은 아닌 것입니다.

• 형상의 의미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보면, 오늘 본문에는 중요한 단어 몇 가지가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형상입니다. 형상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 26절에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이라는 비슷한 단어를 연속적으로 사용한 것은 강조를 나타내기 위한 히브리식 수사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어쨌든 성경은 사람을 일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넘어와서도 형상이라는 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헬라어로 형상은 에이콘(εἰκών, eikon)이라고 부릅니다. 에이콘은 ‘모방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 에이콘에서 바로 이콘(Icon)이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이 단어는 개신교인들에게는 좀 낯선 용어지만 기독교 전통 안에서 매우 유서가 깊은 단어입니다. 이콘이라는 말은 ‘성화(聖畵) 혹은 성상(聖像)’을 뜻하는데, 예수나 예수의 제자들 또는 성인들을 그림이나 조각에 담아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이콘은 그림과 조각을 통해, 믿음의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만들어진 어떤 가시화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이콘은 성경 인물이나 성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나중에는 (모자이크처럼)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게 됩니다.

• 문학에서 말하는 형상

어쨌든 모든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표점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형상, 즉 하나님의 에이콘(εἰκών, eikon)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심어주신 그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우리의 형상, 즉 본래의 나 본질적인 나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규칙을 세우시며 질투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 때문에 마음을 바꾸기도 하는 그런 분으로 등장합니다. 평소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그려오셨습니까? 사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지만, 한편으로 성경에 갇혀 계신 분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너머의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향해 “이스라엘 자손들이 당신의 이름을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졌고, 하나님은 이에 “‘나’는 곧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곧 나다’,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말은 하나님은 인간의 인식 너머에 계신 그 ‘무엇’이라고 말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양한 얼굴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한두 마디의 말로 정의내릴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 자신을 얼마나 아는가?

여러분께서는 평소 여러분 자신을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주로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다 보면,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 사이에 커다란 유격이 있음을 경험하곤 합니다. 예전에 인문학 공부를 할 때, 이런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납니다. 혼자 있을 때의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나, 중에 어떤 모습이 진짜 내 모습에 가까운가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함께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홀로 있을 때가 가장 나다운 모습이라고 여겼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니, 생각을 좀 달리하게 됐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떤 고정적인 모습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 드러나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사실 사람은 홀로 지내기 위해 태어난 존재는 아닙니다. 잠시 타인들로부터 도피할 수는 있어도 계속 홀로 지낼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관계의 동물인 사람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감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게 됩니다.

고전에서는 말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이러한 관계를 탐구해야만 나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다른 이해는 단지 추상에 지나지 않으며, 추상 속에서는 자기를 탐구할 수가 없다. 나는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나를 탐구해야 한다” 이 말은 쉽게 말해,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생각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으며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MBTI나 에니어그램 같은 성격유형검사는 재미로만 하되, 그 유형 안에 사람을 가두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E와 I중에 내향형인 I(아이)인데, 제가 내향형이라고 하면 안 믿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위기냐에 따라 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사람은 언제나 내 안에 다른 모습들이 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도 이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존재인데, 타인을 이해하는 건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 골로새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형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평면이 아닌 입체적 존재입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다양한 인격과 성품 혹은 형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형상은 한 두 마디의 말로 정의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 깨어나지 않은 새로운 가능성들도 우리 안에 내재해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을 보면,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옛 사람의 행실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골3:9-10). 여기서 ‘옛 사람’은 땅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음행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좋아하는 자들이 바로 ‘옛 사람’인 것입니다(3:3). 그리고 ‘새 사람’은 하늘에 속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며 모든 것에 사랑을 더하는 자들이 바로 ‘새 사람’인 것입니다(3:13-14). 바울은 바로 이 ‘새 사람’을 일컬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단번에 성취되거나 획득되는 게 아니라 시간의 축척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반열에 오르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계속해서 또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3:10). 서둘러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 나 자신을 세계 속에 던질 때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얼굴은 입체적이고 다변적이기에,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또한 언제나 변화가 가능하고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외부에서 주어진 주님의 은총 없이 그리고 내부에서 이뤄지는 철저한 자기 노력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은총과 자기 수고가 만났을 때라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보부아르’는 말합니다. “내가 하나의 형태, 하나의 존재를 취하는 것은 사랑 또는 행동을 통해, 나 자신을 세계 속에 던졌을 때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내가 실제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을 때라야,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 된 다라는 말인 것입니다. 번한 말 같지만, 우리는 생각으로만 혹은 입술로만 그리스도인인척하며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내가 맺고 있는 크고 작은 관계들 속에서, 직접 사랑을 실천할 때라야 나는 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이 한 주 동안, 주님 안에서 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해 나가셨으면 좋겠고 또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듯, 다른 누군가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임을 반드시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안에는 여전히 깨어나지 않은 주님의 형상이 잠재해 있을 런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이끄심에 따라, 내 안의 가능성들을 새롭게 발견해 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등 록 날 짜 2022년 08월 21일 12시 26분 00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