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6. 우정과 환대의 세상 열기
설교자 김기석
본문 고후 1:3-7
설교일시 202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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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과 환대의 세상 열기
고후 1:3-7
(2022/09/04, 창조절 제1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요, 온갖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시요, 온갖 환난 가운데에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받는 그 위로로, 우리도 온갖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위로도 또한 넘칩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위로로, 우리가 당하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견디어 냅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과 같이, 위로에도 동참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 아름다운 안식의 여정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제가 없는 동안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가정에도 주님이 주시는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픔과 상실의 시간에 함께 하지 못하여 참 죄송합니다. 벌써 9월의 첫 주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기후 재앙의 현실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파키스탄에서는 대홍수로 460만 명 이상이 직접 피해를 입었고, 30만 명이 집을 떠나 지내고 있고, 1,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현대판 노아의 홍수라는 말도 나오고 있습니다. 제 11호 태풍 힌남노(Hinnamnor)가 북상하면서 많은 피해가 예상됩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기를 빕니다.

저는 석 주 동안의 미국 일정을 잘 마치고 지난 목요일에 돌아왔습니다.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주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빈민 사역을 하는 이태후 목사님의 목회 현장을 둘러보았고, 뉴욕에서는 미국으로 이주한 우리 교우들을 만나 정겨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로드 아일랜드에서는 미국 동북부 감리교 목회자들과 삼일 동안 만나면서 ‘신학과 인문학의 행복한 만남’, ‘시를 통해 맛보는 하나님 체험’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깊은 나눔과 사귐의 시간이었습니다. 보스톤과 시카고에서 말씀을 전하면서 팬데믹을 거치면서 목말라 했던 교인들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내내 제 마음을 사로잡은 단어는 우정과 환대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저를 위해 아낌없이 시간을 내주고 세심하게 배려해주었습니다. 많은 사랑의 빚을 지고 돌아왔습니다. 어느 신학자는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거룩한 낭비’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돈으로 환산하면 2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를 한 번에 쏟아 부은 건 낭비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그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도덕적 자아는 낭비는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건이나 자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는 다릅니다. 모든 사랑은 일종의 낭비입니다.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행위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도 낭비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도 낭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낭비입니다. 함께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는 우정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낭비처럼 보이는 그 시간이 사람들을 굳게 묶어줍니다.

환대의 경험은 우리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느끼게 만듭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는 환대란 낯선 이들이 들어와 적이 아니라 친구가 되도록 만드는 열린 공간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환대는 또한 사람들을 자기 방식대로 동화시키거나 바꿔놓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나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적대감이 가득 찬 세상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아껴주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다시금 힘을 내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육체적으로 고될 수도 있는 일정이었지만 내내 감사와 기쁨 속에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환대의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 믿음으로 산다는 것
경쟁을 내면화한 채 살고 효율성이 숭상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꿈에 동참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하나님의 꿈은 무엇일까요? 생명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세상입니다. 이사야는 일찍이 그 꿈이 이루어진 세상을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으로 그린 바 있습니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사 11:9).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는 세상의 꿈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세상에는 슬픔과 고통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기후 재앙으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극단적으로 분열되고 있습니다. 공존의 길을 모색하기보다는 상대방을 기어코 무너뜨리려고 나서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압 땅에서 그 백성들을 다 불러 모으고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라고 당부했습니다. 언약을 지키는지 여부가 복과 저주의 갈림길입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신 30:19).

믿는다는 것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상에 살면서도 빛을 바라보는 것이요, 악이 기승을 부리는 세상에 살면서도 정의와 평등과 자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분열된 세상을 치유할 힘은 사랑뿐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낯선 이들을 우리 삶에 맞아들이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삶의 성화입니다. 생명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 속에서 깜박거리고 있는 거룩한 빛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공동체 속으로 부르셨습니다. 낯선 이들이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맘몬이 지배하는 세상은 개인들을 고립시킵니다. 돈 때문에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가 분열되고, 평생을 이웃하며 살았던 이들이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해관계의 렌즈로 세상을 보는 순간 세상은 무채색으로 변하고 맙니다. 믿음은 고립에서 벗어나 함께 함의 세상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믿음을 뜻하는 ‘emunah’는 고립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바로 불신앙입니다. Jonathan Sacks는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다름’을 창조하셨다면서, 증오는 다른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무능력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인은 아벨의 타자성과 더불어 살 수 없었고 결국 그를 죽이고 말았다. 바벱탑을 세운 이들은 타자들의 정치학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의 언어와 견해’만 고집했고, 반대자들의 존엄을 부정했다. 애굽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독일은 유대인들의 낯섦을 용납하지 못하여 그들을 죽이고 말았다.”(Rabbi Jonathan Sacks, Future Tense, Schocken, 2009, p.82-83)

• 가시밭길
믿음의 세계에 들어간 이들은 이전에는 결코 경험한 적이 없는 세상과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누리게 될 평화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 14:27).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부름 받은 이들이 누리는 행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롬 14:17).

그러나 믿는 이들이 늘 여유로운 행복만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고난도 겸하여 받습니다. 빛이신 주님도 세상에서 배척당하셨습니다. 요한은 그 까닭은 이렇게 밝힙니다. “빛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사람들이 자기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였다는 것을 뜻한다”(요 3:19). 하나님의 꿈을 가슴에 품은 이들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습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을 미워합니다.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드러내는 이들을 용납하려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멸망할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했습니다.

참 묘한 것은 신앙이 빛나는 것은 평안한 시기가 아닙니다. 가장 어려울 때 믿음의 사람들은 신앙을 더욱 굳게 붙들었습니다. 카타콤베 시절이야말로 신앙이 가장 순수했던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이들은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공인된 순간부터 기독교는 타락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박해가 가해질 때 사람들은 숨어서라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여 박해를 당할 일이 없어지자 사람들의 믿음이 빛을 잃고 시들해졌습니다.

초기의 신자들은 예수를 믿기 위해 위험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막 1:1)는 구절로 시작됩니다. 평범한 도입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한 문장 속에 혁명의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복음’이라는 단어는 조금씩 표현이 다르기는 하지만 로마 황제와 그의 통치를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로마의 첫째 황제인 옥타비아누스 곧 아우구스투스는 ‘신의 아들’, ‘구원자’, ‘평화의 왕’, ‘주님’이라는 호칭을 누렸습니다. 1세기의 신자들은 로마 제국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께 황제에게만 귀속되는 그런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이 세상의 영원한 지배자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은 바벨론 제국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던 왕에게 부여되던 호칭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왕만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다 존엄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입니다. 많은 이들이 믿음을 마음의 평안이나 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믿음이란 완전히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주류 세계의 가치관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살던 유대인들은 바울 사도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자 “세상을 소란하게 한 그 사람들이 여기에도 나타났습니다”(행 17:6)라고 관원들에게 고발했습니다. 영어성경(KJV)은 이것을 “These that have turned the world upside down are come hither also”라고 번역했습니다. 세상을 전복시켰다는 말입니다. 믿는 이들은 그렇기에 누릴 것은 다 누리며 살던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 생명을 택한 사람들
어려운 그 길, 좁은 길을 걷는 이들은 이미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본향을 찾는 나그네들입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박해와 어려움이 다가올 때 어떤 이들은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지만, 더욱 굳건하게 그 길에 서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믿음을 지켰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고후 13:5).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실격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실이 그의 보람이고 위로이고 기쁨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짧은 본문 안에 ‘위로’라는 단어가 열 번 등장합니다. 글을 쓰는 이들은 가급적이면 같은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이렇게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 느낌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흘러넘치는 것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신학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된 교인들 간의 갈등, 소송, 비윤리적 행태 등 고린도 교회는 정말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절통한 마음으로 편지를 보내 그들을 꾸짖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 덕분인가요? 완전하진 않지만 그런 문제들이 잦아들고 교인들이 바른 믿음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에 늘 짓눌리고 있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9) 애태움이 있었기에 위로도 큽니다.

그 위로야말로 고난을 견딜 힘이고, 환난을 당하는 이들을 위로할 근거입니다. 환난을 통해 단련된 마음에서 품격이 나옵니다. 그 품격은 다른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여백을 창조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대가를 치른 이들은 자기 속에 기둥 하나가 들어섰음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기둥이 바로 서면 어지간한 무게가 실려도 붕괴되지 않습니다. 안일하고 평안한 길만 택할 때 우리 영혼은 빛을 잃습니다.

낯선 이들을 우리 삶 속에 맞아들이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려 할 때 우리는 예수의 마음과 깊이 접속됩니다. 모든 요구에 응답할 수는 없다 해도, 한 번 두 번 그런 요구에 응답할 때 우리 영혼에 근육이 생길 겁니다. 미국에서 만난 벗들은 가장 소외된 이들 곁에 머물며 그들이 잃어버린 인간 존엄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거나, 서류가 미비하여 언제든 곤경에 처할 수 있는 이들의 보호자가 되거나,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도움을 제공하고 필요한 경우에 머물 곳을 제공하기 위해 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생명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있었지만 그만큼의 보람도 수확하고 있었습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는 이들이 늘어날 때 해함도 상함도 없는 세상이 조금씩 열릴 것입니다. 주님의 꿈을 가슴에 품은 사람답게 우정과 환대의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9월 04일 12시 18분 1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