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7. 뿌리를 돌아보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신 26:5-11
설교일시 2022-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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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돌아보다
신 26:5-11
(2022/09/11, 창조절 제2주)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십시오.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집트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강제노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더니, 주님께서 우리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비참하게 사는 것과 고역에 시달리는 것과 억압에 짓눌려 있는 것을 보시고,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이집트에서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곳으로 인도하셔서,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게 주신 땅의 첫 열매를 내가 여기에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것을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 놓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레위 사람과, 당신들 가운데서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당신들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십시오.]

•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조금 일찍 찾아온 추석 연휴를 잘 보내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따뜻하고 정겨운 소식만 듣고 싶은 날입니다만 여전히 세상은 아픔이 넘칩니다. 포항 지하 주차장에서 엄마를 구하고 죽은 15살 학생이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엄마 키워줘서 고마워”였다지요? 엄마는 아들의 장례식에서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고 합니다. 세상 도처에 이런 아픔이 있습니다. 지난 8월 21일, 수원시의 다세대주택에 살다가 숨진 세 모녀 사건도 우리 가슴을 저릿하게 만듭니다. 암에 걸린 60대의 어머니와 희소병과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40대의 두 딸이 어떤 사회적 돌봄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풍요를 누리는 세상이지만 우리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나가사키의 소토메라는 소읍에는 엔도 슈사쿠의 문학비가 서 있는데,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리도 슬픈데, 주여, 바다는 너무나 푸릅니다”. 애상에 빠지기는 싫지만 가끔은 세상에 가득 찬 슬픔에 가슴이 미어지기도 합니다. 아픔을 겪는 이들 곁에 조금씩이라도 눈길을 주고, 곁에 다가가고, 그들을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게 우리의 소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백로 절기에 접어들면서 제법 가을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제 얼마 후면 수확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수확의 계절은 감사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추원보본追遠報本 보본반시報本反始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상의 덕을 기억하면서 자기의 뿌리에 보답한다는 뜻입니다. 가을은 조상을 넘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몰락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는데서 시작됩니다. 성경에는 ‘잊지 말라’, ‘기억하라’는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하지만 분주하게 사는 동안 사람은 늘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잊곤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 소명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망각한 채 욕망의 벌판에서 방황합니다. 그래서 만든 게 종교 의식입니다. 반복되는 의식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 공동체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꼭 해야 할 일을 일러줍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에서 거둔 모든 농산물의 첫 열매를 광주리에 담아서,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십시오.”(신 26:2) 약속의 땅에서 거둔 첫 열매를 제사장에게 가져가면 제사장은 그 광주리를 받아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립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그 의례적인 행위의 기본음은 감사입니다. 넉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든 욕망이 충족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받아 누리는 것임을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김현승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받았기에/누렸기에/배불렀기에/감사하지 않는다/추방에서/맹수와의 싸움에서/낯선 광야에서도/용감한 조상들은 제단을 쌓고/첫 열매를 드리었다”. 궁핍함과 시련 속에서도 그들이 감사할 수 있었던 까닭을 시인은 아주 함축적으로 드러냅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내가 누구인가를 그리고/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아는 마음이다”. 감사는 우리 삶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깊이 알 때 우리 속에 저절로 스며드는 마음입니다.

• 기억 투쟁
첫 열매를 제단 위에 바친 후 이스라엘은 한 목소리로 “내 조상은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아람 사람으로서 몇 안 되는 사람을 거느리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몸붙여 살면서, 거기에서 번성하여, 크고 강대한 민족이 되었습니다”(신 26:5)로 시작되는 고백문을 낭송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불과 다섯 절에 불과한 짧은 문장 속에 자기들의 내력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애굽으로의 이주, 크게 번성함, 이집트 사람들의 학대와 강제노동, 하나님께 부르짖음, 강한 손과 편 팔로 그들을 구원해주신 하나님, 가나안 땅 정착 이야기입니다. 이 고백문이 ‘내 조상은’(my father)이라는 일인칭으로 기술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이 의례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자기의 기억으로 바꾼 것입니다.

의례화된 이 구절을 반복하면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곤 했을 겁니다. 대체로 정체성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통해 형성됩니다. 정체성이라는 말을 사전은 ‘상당 기간 일관되게 유지되는 고유한 실체로서의 자기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라고 설명합니다. 옳은 말이지만 조금 복잡합니다. 정체성이란 말을 ‘자기다움’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산다면 그 나름의 특색 곧 그런 ‘다움’을 유지해야 합니다. 특이한 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과거를 통해 형성되었지만 미래에 실현해야 할 가치를 통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품고 삽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정체성은 그렇기에 의무와 헌신과 충성을 내포합니다. 예배는 그런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 후 자기들의 역사를 간략하게 낭독하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억과 소명을 가슴에 새겼던 것입니다. 예배 혹은 의례를 뜻하는 영어 단어 liturgy는 그리스어 ‘leitourgia’에서 온 말인데, 이것이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liturgia’가 되었고 영어 단어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입니다. 레이투르기아는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laos’와 ‘일’을 뜻하는 ‘에르곤ergon’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예배의 특색은 반복입니다. 반복은 지루할 수도 있지만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을 마음에 새기는 과정이기에 소중합니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현재화합니다.

•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모세는 애굽의 압제 아래 신음하는 히브리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그 꿈은 마치 무릉도원 이야기처럼 이상적으로 들립니다. 주전 7세기 그리스 서사시인인 헤시오도스가 말하는 황금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그는 황금시대에는 모든 인간이 어떤 근심도 없이 살고, 신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대지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주기에 인간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채 평화를 누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저는 비옥한 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성취해야 할 세상의 은유로 받아들입니다. 억압과 수탈이 사라지고 사람들이 형제애를 나누며 사는 땅 말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 대부분은 척박했습니다. 모세는 이집트 땅과 약속의 땅을 이렇게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당신들이 들어가서 차지할 땅은 당신들이 나온 이집트 땅과는 다릅니다. 이집트에서는 채소밭에 물을 줄 때처럼, 씨를 뿌린 뒤에 발로 물을 댔지만, 당신들이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는 산과 골짜기가 많아서, 하늘에서 내린 빗물로 밭에 물을 댑니다.”(신 11:10-11)

오랫동안 나는 이 구절을 이집트에서의 강제노동과 가나안에서의 누릴 지복을 대조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조금 다른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은 늘 물이 넘치는 나일강 삼각주와 달리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기다려야 하는 땅입니다. 비가 언제 그리고 얼마나 내릴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관개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하는 땅이 아니라, 하늘의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땅이었습니다. 지정학적으로 보자면 그 땅은 근근이 살아가는 땅이지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살 땅은 아니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네가 신처럼 되리라’라는 뱀의 유혹 앞에서 흔들립니다. 우리 속에는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탐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배의 욕망이 제도화된 것이 제국입니다. 제국은 언제나 힘이 없는 이들을 수단으로 대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이 제국을 미워하시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제국의 그림자 밑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의 신음 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기다려야 하는 이스라엘은 제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없는 땅입니다. 어쩌면 그게 바로 은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함께 누리는 삶
첫 열매를 구별하여 가져오고, 제사장이 그것을 제단 위에 올리고, 온 백성들이 자기들의 내력에 대해 고한 것으로 공식적인 의례는 끝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것을 주 당신들의 하나님 앞에 놓고, 주 당신들의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레위 사람과, 당신들 가운데서 사는 외국 사람과 함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당신들의 집안에 주신 온갖 좋은 것들을 누리십시오.”(신 26:10b-11)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홀로 누리는 것은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를 헤아리고 그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예배의 표징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만 프랑스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아베 피에르 신부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구분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만족하는 사람 즉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과 공감하는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려는 사람 사이에 있다고 말합니다(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백선희 옮김, 마음산책, p.93). 저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아는 사람은 홀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구절도 같은 지점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세 해에 한 번씩 땅에서 나는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따로 떼어서 전적으로 경제적 하층민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레위 사람과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 주고, 그들이 당신들이 사는 성 안에서 마음껏 먹게 하십시오.”(신 26:12b) 언약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서로에게 책임적인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이들의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땀을 흘리고, 사랑과 신뢰 속에서 함께 살고, 관심사를 서로 나누고, 홀로 할 수 없는 일들 이루기 위해 협력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세상으로 형상화한 바 있습니다.

우리 삶이 전적으로 은혜임을 알 때 우리는 더 이상 무정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이야 어찌되었든 나 홀로 만족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좋은 것을 함께 누릴 줄 아는 이들이 늘어날 때 세상은 따뜻해집니다. 수해로 고통을 겪고 있는 파키스탄 사람들, 경주와 포항의 이재민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교회도 고통에 연대하겠다는 마음을 담아 의연금을 보내려 합니다. 모든 고통을 다 해결할 수 없다 하여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도 외면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이 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면 우리 또한 누군가의 선물이 되어 살아야 합니다. 뿌리를 돌아본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이 가을에 우리 삶이 그렇게 조금씩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09월 11일 12시 03분 35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