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1. 자유인의 탄생
설교자 김기석
본문 출 19:1-8
설교일시 2022-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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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의 탄생
출 19:1-8
(2022/10/09, 창조절 제6주)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셋째 달 초하룻날, 바로 그 날 그들은 시내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은 르비딤을 떠나서, 시내 광야에 이르러, 광야에다 장막을 쳤다. 이스라엘이 그 곳 산 아래에 장막을 친 다음에, 모세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 가니, 주님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너는 야곱 가문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너희는 내가 이집트 사람에게 한 일을 보았고, 또 어미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나에게로 데려온 것도 보았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어라." ○모세가 돌아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주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모든 말씀을 그들에게 선포하였다. 모든 백성이 다 함께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모세는, 백성이 한 말을 주님께 그대로 말씀드렸다.]

• 언어의 사회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한로(寒露) 절기에 접어들면서 조석 기운이 제법 선득합니다. 옛 사람은 푸른 하늘을 나는 떼기러기 소리가 찬 이슬을 재촉한다고 노래했습니다. 계절은 이렇게 절서를 따라 변하는 데 인간의 현실은 여전히 무덥습니다. 태국에서는 마약에 취한 전직 경찰관이 총기를 난사해 많은 40명 가까운 무고한 어린이들과 성인들이 죽었습니다. 참혹한 일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이반은 “이 세계 전부도 무고한 어린 아이의 눈물 한 방울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합니다. 거친 세상에 대한 그의 분노가 느껴집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마약의 청정국이 아니라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위험한 세상입니다.

경제가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채소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더니 덩달아 음식 값도 큰 폭으로 올랐습니다. 전기요금, 가스요금, 택시요금이 줄줄이 올랐습니다. 상황이 더 나아질 거라는 전망도 보이질 않습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회원국을 포함한 산유국 협의체 오펙플러스는 11월부터 하루 원유 생산량을 200만 배럴 줄이기로 합의했습니다. 국제 유가 하락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는 하지만 이 일로 인해 분쟁이 격화되고,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올지도 모른다는 우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언어 또한 거칠어집니다. 마음에 여백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따뜻하고 겸손한 말들이 점차 사라지고 차갑고 거친 말, 조롱과 냉소의 말들이 세상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 말들이 사람 사이를 점점 갈라놓습니다. 말이 많을수록 진실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진실은 그 자체로 힘이 있기 때문에 굳이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한글날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것이 1446년입니다. 그전까지는 우리의 입말과 글말이 달랐습니다. 글은 오직 한자로만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수련 과정을 거쳐 글을 아는 사람이라야 사람 대접을 받는 사회였습니다. 사대부들은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의 뿌리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연민의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으로부터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결실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니,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한다. 내가 이를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로 쓰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훈민정음 언해본에 나오는 이 문장에서 저는 백성들에 대한 임금의 깊은 사랑을 봅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들은 상소문을 올려 한글 반포에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그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문자 혁명을 이뤄냈습니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말에 값하는 사건이었습니다.

• 문해력
문명사를 보면 정보 기술의 변화가 인간의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문자가 처음 발명된 것은 교역의 편의를 위해서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인들은 점토판 위에 갈대나 금속으로 사물을 그리거나 짧은 선으로 숫자를 표기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그 모양이 쐐기 형태를 닮았다 하여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 혹은 쐐기문자라 불렀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과 중국인들은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상형문자(象形文字, hieroglyphics)를 만들어냈습니다. 두 경우 모두 배우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수없이 많은 것들을 암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문자를 해독하고 기록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 사회의 정보를 독점했고, 정보의 독점은 권력을 낳았습니다. 위계적 사회는 언어를 다루는 것과 관련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알파벳의 발명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알파벳은 셈족에게서 나왔다고들 합니다. 사실 알파벳(alphabet)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첫 글자인 aleph와 bet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알파벳이 등장하면서 많은 이들이 손쉽게 언어를 익힐 수 있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자는 여전히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중세의 유럽을 지배하던 언어는 라틴어입니다. 신학이든 철학이든 라틴어를 모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3세기에 단테가 쓴 <신곡>은 라틴어가 아닌 대중언어인 토스카나어로 쓰여졌습니다. 이 책의 압도적인 영향력은 거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신곡>과 더불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루터는 독일의 도시 아이제나흐에 있는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서 성경을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독일어로 옮겼습니다. 종교개혁은 이 번역을 통해 일반 대중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200여 대의 인쇄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통해 성경과 루터의 글들이 대량으로 인쇄되고 유포되었습니다. 지식인들에게 독점되었던 정보가 대중들에게도 보급되면서 사회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 시내산 언약의 의미
그런데 이런 혁명을 저는 성경에서 먼저 발견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애굽을 떠나 갈대바다를 건너 광야로 들어간 탈출 공동체는 시나이 반도에 있는 수르 광야, 바란 광야, 신 광야를 지나는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수르 광야에서는 마실 물이 없어 시달리다가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하는 이적을 맛보았습니다.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진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자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 그들을 보살펴 주셨습니다. 르비딤에 머물 때에는 오아시스를 근거로 살아가던 아말렉 사람들이 몰려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이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매우 중요한 일이 벌어집니다. 지금까지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는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한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할 때 모세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가만히 서서, 주님께서 오늘 당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지켜 보기만 하십시오. 당신들이 오늘 보는 이 이집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을 구하여 주시려고 싸우실 것이니, 당신들은 진정하십시오.”(출 14:13-14)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돕기 위해 직접 아말렉을 공격하지 않으십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지시합니다. “장정들을 뽑아서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시오.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산꼭대기에 서 있겠소”(출 17:9).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미성숙상태에 그대로 두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또 거기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로 성장시키고 싶어 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는 않으십니다. 아이에게 처음 심부름을 시키면서 아이 몰래 뒤를 따라 가는 부모처럼 하나님은 그들의 뒤에서 그들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자유가 없으면 책임도 없는 법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지시에 따라 사는 데만 익숙한 사람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자유인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나타난 것이 시내산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산으로 불러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줄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출 19:5a)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고대 세계에서 신의 뜻을 받는 이들은 왕 혹은 사제뿐입니다. 왕권신수설, 즉 왕의 권한은 신으로부터 운명적으로 부여된 것이라는 주장은 고대세계에만 통용된 것은 아닙니다. 17세기 프랑스 절대왕정 시기에도 이런 주장이 먹혀 들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신의 뜻을 알 수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고, 알려고 해도 안 되었습니다. 왕과 사제만이 신의 뜻을 독점했고 그것이 그들의 권력 기반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당신의 뜻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말씀을 다 지키겠다고 약속하면 비로소 언약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이, 안 할래’하고 말하면 그 일은 없던 일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자유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들입니다. 주인들은 한 번도 종들에게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묻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복종할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주체 곧 자유인으로 부르셨습니다. 나중에 모세가 백성들을 모아놓고 언약의 책을 낭독하자, 그들은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말씀을 받들어 지키겠다”(출 24:7)고 응답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유롭게 하나님의 뜻에 응답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 미래에 대한 기억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있나요? 외적으로 우리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우리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늘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하고 삽니다. 한편으로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기를 바라면서도, 다른 한 편 다른 이들과 같아지려고 눈치를 봅니다. 왕따를 당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론의 동향에 민감합니다. 화제가 되는 사안을 뒤따라 말하고 퍼뜨리기도 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성찰하고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은 말을 마구 내뱉으며 삽니다. 혹시라도 남이 아는 어떤 정보를 놓칠세라 호기심어린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립니다. 비눗방울처럼 피어올랐다 스러지는 것들에 마음을 쓰느라 정작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 정신은 쉴 사이 없이 겅중거리며 정보와 정보 사이를 건너뜁니다. 그래서 다들 숨이 가쁘고 바쁩니다.

나무 밑에서 낮잠을 자다가 사과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깨어난 토끼가 하늘이 무너진 줄 알고 달리기 시작하자, 다른 동물들도 영문도 모른 채 내달린다는 우화 속 이야기가 우리 현실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야말로 누군가의 종살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비사회의 신민으로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이 이사야의 탄식입니다. “신들을 찾아 나선 여행길이 고되어서 지쳤으면서도, 너는 ‘헛수고’라고 말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너는 우상들이 너에게 새 힘을 주어서 지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구나”(사 57:10). 신앙생활은 잠시 멈추어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우리 마음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자꾸 돌려보내고, 지향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의하면 그들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이 그 정체성의 뿌리를 과거에서 찾는 나라가 아니라 미래에서 찾는 나라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들은 민족적, 인종적, 문화적 동질성 때문에 한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형제와 자매로 살아가는 세상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율법은 그런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가르침을 담고 있고, 예언자들은 그런 비전을 잃어버린 왕과 백성들을 책망하여 지향을 바로 하도록 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기억 혹은 기대하며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 꿈을 잊지 않을 때 오늘을 충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바른 길로 안내해야 할 책임을 맡은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과 깊이 결합될 때,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바칠 때 주어주는 선물입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행하는 구실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사십시오.”(벧전 2:16) 어둡고 냉랭하고 각박한 세상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밝고 따뜻하고 너그러운 곳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유인의 직무입니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어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22년 10월 09일 12시 03분 33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