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43. 주님과 같으신 분 또 없다
설교자 김기석
본문 미가 7:18-20
설교일시 2022-10-23
오디오파일 s20221023-2_설교.mp3 [52597 KBy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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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같으신 분 또 없다
미 7:18-20
(2022/10/23, 창조절 제8주)

[주님, 주님 같으신 하나님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살아 남은 주님의 백성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진노하시되, 그 노여움을 언제까지나 품고 계시지는 않고, 기꺼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주님의 발로 밟아서, 저 바다 밑 깊은 곳으로 던지십니다. 주님께서는 옛적에 우리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여 주십니다.]

• 격변의 시대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나무들은 서서히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녹색의 잎들이 서서히 다양한 빛으로 물들어가며 가을 산의 정취를 꾸며주고 있습니다. 단풍은 우리에게 소멸에의 의지와 살려는 의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버려야 할 것을 버려야 생명이 안으로 자랍니다. 사람도 그런 이치를 배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총리가 취임 44일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가 시도했던 초대형 감세 정책이 참담한 실패로 돌아가자 책임을 지기 위해 사퇴를 결정했습니다. 후유증은 남겠지만 비교적 깔끔한 마무리입니다. 때를 분별할 줄 아는 게 성숙한 사람이라면 그는 물러나야 할 시간을 제대로 가늠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요즘 전 세계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긴축 정책이 전 세계의 경제 질서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살던 고대인들의 삶의 원리가 더 이상 우리에게 유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자기를 중심에 세우기 위해 타자를 밀어내려 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인은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창 4:9) 하고 대꾸합니다. 우리도 동일한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문제는 그 질문 앞에 멈추어 설 여백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 학벌, 연줄, 권력, 명예에 대한 욕망도 따지고 보면 힘에 대한 열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힘을 가진 이들은 겸손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노력한 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힘을 숭상하는 이들에게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웃은 만나기 싫은 사람이거나 자기들의 선의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대상물일 뿐입니다. 개인의 경우도 그러하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늘 제국들의 전쟁터가 되곤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구약 성서의 지리적 세계, 곧 성경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땅을 가리켜 비옥한 초승달 지역(fertile crescent)이라 부릅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 유역, 시리아와 지금의 터키 동부 지역, 레바논과 이스라엘, 상하부 이집트를 선으로 이으면 초승달 모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물이 풍부한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권과 이집트 문명권, 이후에는 그리스 로마 문명권이 충돌하는 지점에 있었습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처럼 이스라엘은 제국들이 자웅을 가리는 무대가 될 때가 많았습니다.

주전 8세기는 성경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남쪽에 있는 세력들을 제압한 앗시리아는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대규모 전쟁을 벌였습니다. 앗시리아는 정복지에서 공포의 정치를 펼쳤습니다. 반역을 꾀하는 이들을 사로잡아 산 채로 껍질을 벗기는가 하면 팔과 다리를 자르거나 눈을 뽑는 등 정말 반인륜적인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했습니다. 반역의 싹을 자른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그런 잔학 행위 속에 자기 파멸의 씨앗이 자라고 있음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살아남기 위해 친앗시리아 정책을 펼쳤지만 그건 미봉책에 불과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처럼 이스라엘이라는 북쪽 범퍼가 사라지자 유다는 앗시리아의 압박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산헤립의 침략으로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 마흔 여섯 개가 파괴되었습니다. 미가는 미구에 닥쳐올 예루살렘의 파괴를 우울하게 내다보았습니다. 예언자(nāḇî)는 ‘보는 사람’(ḥōzê)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봅니다. 다른 이들이 자기 욕망을 좇느라 보지 못하는 파국의 현실을 먼저 보기에 그들의 언어는 격정적입니다.

• 호모 엠파티쿠스
예언자들은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사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는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주목하는 것은 출애굽 정신입니다. 애굽은 하층민들을 비인간으로 대하거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일이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세계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체제 밑에서 시달리는 이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죄와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은 인간을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받는 세상의 꿈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이스라엘은 그 초심을 잃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몰랐습니다. 권력자들은 빈자에게서 탐나는 밭을 빼앗고,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았습니다. 미가는 그런 현실을 보며 격분했습니다. 위임된 권력을 사욕을 채우기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역사는 퇴행을 거듭합니다. 권력이 사사로이 집행될 때 세상은 무정한 곳으로 변합니다. 탐욕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됩니다. 배를 하나님으로 삼는다는 말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참담한 소식에 접했습니다. 평택에 있는 SPC 빵공장에서 청년 노동자 한 분이 야간작업 중 교반기라 하는 소스 배합기에 끼어 숨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주일 전에도 그런 끼임 사고가 있었다고 하는데 회사는 안전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비용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것만 해도 참담한 일인데 그 억울한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그 현장을 흰색 천으로 덮어놓고 다른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계속하게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사람의 공감 능력은 점점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상대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인지적 공감은 물론이고, 상대가 느끼는 감정이나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아파하는 정서적 공감도 작동하지 않습니다. 무정한 마음은 굳은 마음이고 죽음에 가까운 마음입니다. 무정한 마음과 대비되는 말은 다정함입니다. 다정함이란 상대와 감정을 공유하고, 그에게서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낼 줄 아는 능력입니다(올가 토카르추크, <다정한 서술자>, 최성은 옮김 민음사, p.363). 그런 능력이 사라진 세상은 을씨년스럽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동하는 것은 주님이 베푸시는 무한한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의 통로가 바로 다정함 혹은 공감 능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의 아픔을 당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셨고, 깊은 소외감 속에 살아가는 이들의 쓸쓸함과 공허감을 어떻게든 덜어주려고 애쓰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으로 수납하는 주님에게서 사람들은 깊은 위로를 받았고, 절망을 딛고 일어나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역사의 진보란 바로 공감 능력의 확대입니다.

• 공의로우신 하나님
예언자들은 바로 그런 세계로 돌아가자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경외하는 이들을 보호하시고 아끼시지만, 당신의 뜻을 거역하는 이들에게는 엄중한 책임을 물으십니다.

“주님은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고 권능도 한없이 많으시지만, 주님은 절대로, 죄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나훔 1:3a)

이 말씀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죄 사함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나’의 죄 때문에 주님이 치르신 그 고귀한 희생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죄송함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고백만 있을 뿐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대가나 희생을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은혜는 싸구려 은혜라 했습니다. 싸구려 은혜는 우리의 죄를 덮는 덮개에 불과합니다.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는 아직 은혜의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미가는 지도자들의 행태에 깊이 분노합니다. 바른 말을 해야 하는 예언자들은 오직 이익에만 정신이 팔려 있고, 정의에 관심을 가져야 할 지도자라는 이들은 선한 것을 미워하고 악한 것을 사랑합니다.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 홀로 배를 불립니다. 지도자들이 그러하니 백성들의 삶 또한 다를 바 없습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썩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들의 죄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미가는 그런 삶이 빚어내는 결과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너희는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을 것이며, 먹어도 허기만 질 것이며, 너희가 안전하게 감추어 두어도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며, 남은 것이 있다 하여도 내가 그것을 칼에 붙일 것이며, 너희가 씨를 뿌려도, 거두어들이지 못할 것이며, 올리브 열매로 기름을 짜도, 그 기름을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포도를 밟아 술을 빚어도, 너희가 그것을 마시지 못할 것이다.”(미가 6:14-15)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 질주하는 이들은 영혼의 허기증과 공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자기 세대에 절망한 나머지 미가는 자기들의 처지가 마치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과일나무와 같다고 탄식합니다. 열매가 하나도 없어서 아무도 다가와 허기를 채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신실한 사람 하나 찾을 길 없고,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미가 7:2). 이렇게 이스라엘은 망하고 마는 것일까요?

• 희망의 뿌리
아닙니다. 사람은 조석으로 변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우리 희망의 뿌리입니다. 미가는 폐허와도 같은 현실 저 밑바닥에서 새롭게 꿈틀거리는 희망을 봅니다. 불씨가 아주 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처벌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신뢰하고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희망입니다. 미가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호세아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주님께로 돌아가자. 주님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고, 우리에게 상처를 내셨으나 다시 아물게 하신다”(호 6:1)

이 사랑을 신뢰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심판과 징계는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주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이 은총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사유하시는 분이십니다. 진노하시되, 그 노여움을 언제까지나 품고 계시지는 않고, 기꺼이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미가는 깊이 감격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 같으신 하나님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미가 7:18). 미가는 자신의 이름을 이 대목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미가의 뜻은 ‘누가 주님과 같은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사하시면서 다시 시작해 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ĕmeṯ)과 한결같은 사랑(ḥeseḏ) 덕분입니다. 삶의 상황이 어려울 때마다 우리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곤 합니다. 역사가 혼돈 속으로 되돌려지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날 때마다 어둠이 조금씩 우리 영혼을 잠식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중력에 이끌리는 사람이 아니라 은총에 이끌리는 사람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옥중에 갇혀서도 찬미를 올렸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런 단호한 믿음을 잃어버려서 우리 삶이 흐물흐물해졌습니다. 우리는 무너지는 세상의 기둥을 다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꿈에 이끌리는 사람들입니다. 미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번제물이나 많은 제물이 아니라면서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가 6:8)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악과 무정함과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번져가는 이 세상에 맞서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이 번성하는 조건은 선한 이들의 침묵입니다. 무정함을 녹이는 것은 사랑과 공감과 이해입니다. 적대감이 가득 찬 세상에 환대의 공간을 넓혀가는 것이야말로 부름 받은 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가 이미 울렸습니다. ‘주님과 같으신 분 또 없다’는 고백이 우리의 삶의 고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등 록 날 짜 2022년 10월 23일 12시 01분 21초